워낙 나라가 복고풍으로 돌아가다 보니 매일 신문 지상에서 케케묵은 낱말들을 다시 보게 된다. ‘백골단’, ‘불온서적’, ‘이적단체’, ‘좌익척결’ 등. 그러더니 며칠 전에 급기야 주책없이 ‘삐라’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듣자하니 우익단체에서 북한을 향해 삐라를 매단 풍선을 날려보내고 있단다. 북한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것이야 존중해야 할 하나의 견해라 쳐도 그 견해를 실천하는 방식의 그 아득한 원시성이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한 30년은 뒤떨어졌을 낙후한 북한사회와 똑같은 시간대를 사는 이들이 바로 대한민국 우익. 어쩌면 수준이 그렇게 똑같을까?
21세기에 주책없이 튀어나온 ‘삐라’를 추억하려면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 우연히 북한에서 날아온 삐라를 한장 주웠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파출소에 들고 갔더니, 경찰 아저씨가 기특하다고 칭찬하며 상으로 얇은 연필 한 자루와 만화책 한권을 준다. 만화는 손오공이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을 잡는 내용이었다. 이게 웬 떡이냐. 종이 쪼가리 하나가 지닌 이 막강한 교환가치는 어린이의 심성에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중요한 정보는 모름지기 공유하는 것이 공동체 성원의 도리. 다른 아이들에게 얘기했더니, 저 멀리 들판에 나가면 도처에 널린 게 삐라란다.
다음날 우리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논과 밭을 뒤져 무려 86장의 삐라를 주웠다. 그것은 곧 연필 86자루와 만화책 86권을 의미했기에, 그 추운 겨울날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결코 춥지 않았다. 벌판에서 주운 노다지를 들고, 우리는 함께 파출소를 찾았다. 그런데 경찰 아저씨의 태도가 하룻밤 사이에 돌변했다. 연필과 만화책을 주기는커녕 외려 꿀밤을 주며 야단을 친다. “너희는 공부는 안 하고 만날 삐라만 주우러 다니냐?” 얼마나 황당한가. 아무튼 이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생이란 단순한 수학으로 설명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행동반경은 넓어졌고, 그럴수록 삐라를 볼 기회도 많아졌다. 하지만 이제 삐라로 연필과 만화책을 얻을 수는 없음을 알기에 삐라의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야 했다. 마침 당시는 우표 수집이 크게 유행을 하던 시절. 삐라의 종적 다양성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벌판에서 주운 삐라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삐라의 수집을 시작하면서 벌판에서 삐라를 보는 나의 안목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오로지 양만 추구했다면, 이제는 삐라의 질적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표 수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역시 디자인의 독창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소성이다.
‘춥고 배고픈 설날’, ‘박정희 역도’, ‘김일성 수령 동지 만수무강 하소서’, ‘양키 고우 홈’, ‘남조선은 미국의 52번째 주’, ‘발전하는 평양의 모습’ 등. 시간이 갈수록 앨범은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풍부해져만 갔다. 하지만 나의 이 고상한 취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집에서 내 앨범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 살벌하던 시절, 자기 집에서 다량의 이적표현물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갖다 불살라버리라고 하셨다. 결국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나의 컬렉션은 너무나 허무하게도 화염 속에서 한줌의 재로 돌아가고 말았다.
30년 만에 다시 접한 ‘삐라’ 얘기. 남에서 북으로 보내는 삐라에는 연필이나 만화책 대신 간간이 달러나 위안화가 붙어 있다고 한다. 남쪽의 도발에 북쪽에서는 작정이라도 한 듯 이같은 행태가 계속될 경우 개성공단의 경협까지 중단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다. 대책없이 설치다가 통미봉남에 걸려 북한의 눈치를 살피는 정권에 이게 적잖이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우익단체에서 하는 일, 촛불 때려잡듯 때려잡을 수도 없잖은가. MB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은 대한민국 우익. 잘한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