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 감독은 연극인의 미래를 꿈꾸는 10대였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의 반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무감동하게 러시아어학과에 들어갔다. 연극영화과가 아니라면 어떤 길이든 별반 차이가 없을 터였다. 졸업 뒤 3년 동안 해운회사를 다니던 그녀의 마음은 다시 들썩였다. 수능시험을 다시 볼 필요가 없다는 장점에 끌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지원했고 콘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영상원에 합격했다. 그녀의 영화에서 오랫동안 다급할 것 없이 인간을 관찰한 자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경미 감독은 여고생의 동성애적 감정을 그린 단편 <거짓말>과 연애의 동상이몽을 간파한 <기억>, 배우 박해일을 캐스팅한 <오디션>을 차례로 내놓았고, 2004년작 <잘돼가? 무엇이든>은 장부조작 특근에 동원된 두 여직원의 미묘한 경쟁과 유대를 그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최고의 상을 받았다. <미쓰 홍당무>는 그녀의 재능을 신용한 제작자 박찬욱 감독과 충무로 중견 스탭들의 지원 속에 만들어졌다.
-평소에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나는 영화를 보고 어떤 식으로든 자극을 받을 때 기분이 좋다. 미처 생각지 못한 사실, 생각 못한 상황을 영화를 보고 깨달을 때 살맛이 난다. 우리는 살면서 특정 부분만 움직이지 않나. 그럴 때 우리가 쓰지 않는 부분들이 배고파하는 것 같다. 영화에 약간의 판타지도 필요하지만 너무 뻔한 거짓말은 재미없다. 특히 멜로가 그렇다. 날씬하고 예쁜 여자들이 못생긴 여자입네 하고 나오고.
-그래서 본인의 영화는 자극을 주는 영화로 만들려고 했나. =내 허기가 충족될 때 느끼는 만족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배고픔을 채워주는 영화의 예를 들어줄 수 있을까. =미하일 하네케 감독은 언제나 신선하다. 요즘 영화가 기름기가 많고 현란하다보니 사운드와 영상을 과감하고 미니멀한 수법으로 엮어내는 하네케의 작품을 보면 구겨져 있던 안구가 다림질되는 기분이다. (웃음) 아마 내가 절대 못 만들 영화라서 더욱 좋아하는 것 같다. 우디 앨런 영화도 좋다. 도시를 좋아하고 대사가 많은 점이 내 영화와 닮은 데가 있다. 그런데 제일 끌리는 작품은 가장 우디 앨런답지 않다는 <매치 포인트>다.
-<미쓰 홍당무>는 마케팅에서 ‘캐릭터 영화’의 컨셉을 내세우고 있다. 감독 입장에서도 인물로부터 출발한 영화인가. =‘캐릭터 영화’라고 불린다면 의도가 성공한 거다. 대작을 할 생각은 없었고 제작사에 손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작은 영화를 내실있게 만들고 싶었다. 예를 들어 크레인 한번 쓰자면 그것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단순한 비주얼로 내실을 기하려면 캐릭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연출력으로 승부를 걸며 캐릭터와 대사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자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2.35:1의 화면비율을 선택했다. 두 인물을 허리까지 잡은 숏은 아래위가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원래 2.35:1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미쓰 홍당무>는 보이는 게 인물뿐인데, 그들이 모여 언쟁하는 하이라이트가 어학실 장면이다. 갇혀서 말로만 싸우는데 단독 숏은 재미가 없고 누가 말을 할 때 반응하는 다른 사람들이 화면 안에 잡혀 관계를 보여줬으면 했다. 3인 숏이 나오길 바랐다. 학교 공간을 잡기에도 적당했고.
-그러고 보니 칠판의 가로세로비가 생각난다. 쥘 르나르의 소설 <홍당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편애의 희생자인 빨강머리 소년 홍당무도 위악적인 외톨이다. 제목 이상으로 닮은 점이 많다. =르나르의 <홍당무>는 정말 잔인하고 처절한 이야기다. 영화의 가제도 <홍당무>였고 시나리오 쓰면서 다시 책을 읽었다. 특히 잊히지 않는 장면은, 볼이 발그레한 급우를 선생님이 귀여워하자 홍당무가 유리창을 깨서 피를 얼굴에 바르는 대목이었다. 위악적이면서도 매력적인 홍당무의 캐릭터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감독이 직접 쓴 영화 주제가 가사 중 “얼마나 빨개져야 날 보아줄까”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얼마나 화를 내야 새빨개질까, 얼마나 빨개져야 날 보아줄까”였나. 책의 잔상이 그 대목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은 <잘돼가? 무엇이든>에 나왔던 지영의 집요함과 희진의 뻔뻔함이 한데 모인 인물이다.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장편으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고 물으셔서, <잘돼가? 무엇이든>의 희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보니까 지영과 희진이 다 들어가 있다.
-미숙이 따돌림당하는 큰 이유가 안면홍조증이라고 설정돼 있긴 하지만 극중에서 남들이 드러나게 붉은 얼굴을 손가락질하진 않는다. 달리 보면 안정적 직업에 추한 모습도 아닌데, 사실 문제는 성격이고 안면홍조는 상징에 가깝지 않나. =성격이 제일 문제다. 마지막에 코트를 벗고 머리를 묶은 어학실 장면에서 사실 미숙이도 예쁜 아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감만 가지면 예쁠 수 있는데 스스로 창피해서는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고 코트로 몸을 가리니까 미워 보이는 거다. 결국 콤플렉스가 문제다.
-영화 도입부에서 미숙이 교문 앞에서 삽질을 한다. 일상적으로 쓰는 “삽질한다”는 속어를 뜬금없이 실제로 삽질하는 행동으로 보여준 거다. 영화의 리얼리티가 아슬아슬해지는 순간이기도 하고 “나 이런 영화야”하고 내지르는 느낌이었다. =시나리오를 오래 붙들고 있으면서 너무 힘들다보니 “누가 나더러 삽 주고 땅 파라면 지금 가진 열정으로 지구 반대편까지 파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게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거다. 리딩할 때 효진씨도 가장 납득 못해 힘들어한 부분이다. 그래도 미숙이 우리와 같은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기대를 애초에 깨줘야 다음부터 연달아 나오는 엽기적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다 싶었다.
-질투라는 감정을 깊이 생각하나. =그렇다. 특히나 우리나라같이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심한 사회에서 질투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다른 집 애들이 학원을 가니까, 어학연수 가니까 우리 아이도 가야 한다. 남들처럼 못하는 것이 스스로 미워지기도 하고. 나는 싸움과 분쟁을 싫어하는 성격인데, 질투라는 감정도 느끼기 싫어한다. 연애할 때도 남자친구가 나로 하여금 질투를 느끼게 하면 따지지도 않고 그냥 안 봤다. 내가 질투를 그리는 건, 내가 질투를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양미숙의 나이를 스물아홉으로 잡았다. 미숙의 짝궁인 종희를 그녀의 엄마가 임신한 것도 같은 나이로 명시돼 있다. =학교 졸업하고 직장 생활 3년쯤 되면서 회사에도 권태를 느끼고 결혼은 어떡하나 고민스러울 때다. 나 역시 그즈음 방황을 하고 전환점을 만들어야겠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여태 살아온 방향이 맞는지, 길을 바꾸어야 하는 것인지 점검한 시기였고 주위 많은 여자들도 그때 사춘기를 겪더라.
-진행되는 이야기는 우스운데 장영규 음악감독의 스코어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과 긴장을 슬쩍슬쩍 흘린다. =장영규 감독님이 작업한 <복수는 나의 것> O.S.T는 한국 영화음악 중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라 1년 내내 듣고 다닌 시절도 있었다. <미쓰 홍당무>의 음악은 불안하고 우울한 느낌에 엇박과 단조도 많다. 영화가 코미디이면서도 애처러운 면이 있어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싶은 순간을 갖듯, 음악도 재미와 슬픔을 오가며 긴장을 유지시켜 주길 바랐다. 사실 편집에서도 객기를 부렸다. 영화적 정보를 주는 방식이 안정적이지 않았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편집이 아니라 “저게 무슨 장면이지?” 긴장하도록 그림의 순서를 잡았다. 이야기가 작다보니 관객이 손을 놓지 않고 궁금증을 품게 하고 싶었다.
-<잘돼가? 무엇이든>이 비정성시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2004년 미쟝센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 박찬욱 감독을 만나 박 감독이 대표로 있는 모호필름에서 장편 데뷔작을 연출하게 됐다. 작품 윤곽이 나오기도 전에 이경미 감독에 대한 믿음만으로 계약한 건가. =얼굴이 잘 빨개지는 여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정도만 말씀드렸다. 박찬욱 감독님이 프로듀서가 아니었다면 이런 영화의 제작은 불가능했을 거다. 믿어주시고 계약했을 때는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시나리오가 난산을 겪자 부담감이 정말 컸다. 주인공 양미숙이 과대망상증, 조울증, 건강염려증 등등 현대인의 질병을 한몸에 가진 것도 시나리오 쓰는 내가 부담을 갖고 침잠하면서 힘들어진 것이 반영된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실제로 증상을 겪었단 말인가. =조울증이 심할 때는 3박4일 한숨도 못 자곤 했다. 다한증도 없는데 손이 계속 땀에 젖었다. 영화사 사무실에서 혼자 작업을 했는데 빨리 끝내고 싶은 욕심에 회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사무실에 간이침대 놓고 일주일 넘게 먹고 자고 했다. 그러다보니 방문한 후배가 사다준 허브 화분 하나가 <캐스트 어웨이>의 배구공 같은 유일한 친구가 됐다. 그런데 잠깐 집에 다녀온 사이 회사 직원이 뜨거운 물을 줘서 화분이 시들어버렸다. 눈물이 많은 편도 아닌데 정말 친구가 죽은 양 방에 들어가 눈물을 쏟을 만큼 상태가 나빴다.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과 <미쓰 홍당무>를 보면 한국의 젊은 여자들의 행태에 대한 유심한 관찰이 있다. 한발 떨어져 보면 기이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그들의 모습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친한 사람이 나와 성격이 정반대인 여동생이다. 중·고등학교도 여학교였고 졸업 뒤 다닌 해운회사에는 여직원이 많아 모임도 활발했다. 명절 때면 여직원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사장네 가서 절을 했던 경험이 인상적이었다. 분쟁을 싫어하는 성격이긴 한데 여자들이 친해졌다 돌아서고 뒤에서 욕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나 역시 그런 적이 있고. 동생과 나는 꼭 <잘돼가? 무엇이든>의 지영과 희진 같다. 자매가 아니었다면 절대 친구가 되지 않았을 성격이다. 가족을 보면서 인간에 대해 많이 배운다. 부모님에 대해서도 어떤 면은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어떤 면은 결코 닮기 싫다. 네 식구가 서로 그럴 거다. 가족 아니면 외면했을 모습인데 그 안에서 많이 배운 다음 남들에게 깨달음을 투사하면 못 보던 걸 본다. 회사를 다니면 배신의 순간들이 많다. 그렇다고 내가 정의감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걸 발휘할 사람이면 관찰자의 시선도 안 나올 거다.
-살면서 누구나 느끼는 바지만, 그것을 영화의 주요 소재로 선택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왜 그럴까.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는 창피해해서 그럴 수도 있고 영화로 잘 만들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 같다.
-혹시 시트콤을 좋아하지 않나. =좋아한다. <똑바로 살아라>는 정말! 나와 절대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의 영상원 남자동기가 있었다. 그런데 <똑바로 살아라> 하는 동안은, 방송 끝나자마자 전화가 와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날의 방송을 이야기했다. 프로그램 종영 뒤에는 연락이 뚝 끊겼다. (웃음)
-러시아어로 라이터를 뜻하는 단어 ‘좌지깔까’를 영화에서 효과적으로 썼다. 대학에서 러시아어과 다니면서 언젠가 영화에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가. (웃음) =아니다. 당시는 영화를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미쓰 홍당무>의 주인공을 고등학교 러시아어 교사로 설정하고 음란채팅 이야기가 나오면서 홀딱 깨는 절정을 만들어줄 외설적 단어로 ‘좌지깔까’가 떠올랐다.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무의식에 흩어져 가라앉아 있던 조각들이 맞춰져가는 것 같다.
-<미쓰 홍당무>를 가리켜 캐릭터 영화라고 한다면, 양미숙뿐 아니라 모든 극중인물을 포함한 말일 거다. 포스터를 보고 공효진의 활극을 예상했지만 조연들의 비중이 생각보다 컸다. =시나리오를 쓰고 미숙이가 천사구나 생각했다. 못된 천사다. 미숙이를 만나 유리도 변 선생을 짝으로 만나고 종희도 미숙을 만나 부모가 화해한다. 결과적으로 미숙이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녀로 인해 모든 인물이 제자리를 찾고 안정되게 살 자리를 마련해준다. 어찌 보면 이 아이는 예수 같다는 생각도 했다. 인간의 질병과 어둠을 다 가졌으니까. 그녀는 삽질로 모두에게 행복한 선물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