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적 취향에 있어서의 계급적 차이에 주목한다. 계급적 차이들은 문화적 차이들을 생산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차이들이 재능이나 성취 같은 개인적 특성에 따른 것이라고 잘못 인식되기 때문에 결국 계급체계를 정당화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말하자면 ‘문화자본’도 세습된다는 것인데, 한국에서 그의 말이 어떻게 적용될지를 떠올려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일단 학벌. 세습되는 것 맞다. 강남 8학군 출신 학생들과 전문직 자녀들의 명문대 합격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뉴스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영어. 이것도 계급문제 맞다. 수능점수가 엇비슷한 같은 대학 같은 학과 학생들을 비교해보면, 집안의 소득 수준에 따라 차이가 나는 능력은 영어 구사 능력 정도라고 한다. 영어몰입교육이라는 에피소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나라는 영어를 잘하는 이들이 영어를 못하는 이들을 착취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목하 노력 중이다. 그런데 다른 것들은? 사실 부르디외가 말하는 문화자본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사람을 차별할 수 있는 잣대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부르주아들이 자기들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세련되고 고상한 것들이 제 잘난 탓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계급적 특성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는 단언이었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든, 미술적 안목이든, 고전에 대한 독서든, 뭔가 비물질적인 부분에서 내세울 게 있지만 그것도 기원은 물질적인 것에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차이가 있을까? 그야 있는 집 자식들이 루브르 박물관이라도 한번 더 가봤을 테고 집에 영어로 된 미술책이 있을 확률이 높으니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가령 이건희 회장 일가를 생각해보라. 비록 세금납부를 피해가려는 의도에서이기는 하나 방대한 미술품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방면의 차이가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는 것도 현실이다. 부르주아들이 ‘문화자본’을 구축하게 되는 것은 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돈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가치 또한 소유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을 ‘허영’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그렇다고 치자. 문제의 핵심은 우리 사회의 부르주아들이 그런 ‘허영’에 쉬이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없는 이들에게 문화자본을 자랑하는 법이 없고 돈과 상관이 없는 일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광고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성공한 이유는 남들을 철두철미하게 잘 쥐어짰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재능’이나 ‘능력’이라는 수사로 포장하는 것이다. 모종의 천박함이 재능이란 이름의 가치로 전도되고, 없는 이들은 이 재능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결국 계급체계를 정당화하게 되는 문화적 차이”라는 부르디외의 논의는 한국적 실정에서 고급문화에 대한 감수성이 아니라 이런 유의 천박함을 지칭한다. 그러니 슬프고 우스꽝스럽게도 남는 건 학벌과 영어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한국 부르주아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증명하는 위대한 사례를 또 한번 접했다. 기아자동차 모닝을 위탁생산하는 동희오토라는 기업인데, 기업 안에 10여개의 하청기업이 있고 노동자는 100% 비정규직이다. 해마다 10여개 하청업체 중 한두개를 폐업하고 새로운 사장과 재계약하면서 근속, 임금 등을 승계하지 않고 마음에 안 드는 노동자들을 손쉽게 갈아치운다. 이런 ‘편법’을 통해 그해의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임금으로 제조업 생산라인을 돌리고 있는데, 부르주아들은 이를 최고의 경영혁신 사례로 자랑한다. 정말 징글징글한 ‘문화적 습속’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