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quila Sunrise 1988년, 감독 로버트 타운 자막 영어, 한국어 화면 포맷 1.33:1, 1.85:1 지역코드 3
상당히 어렸을 때 비디오 테이프로 <불타는 태양>을 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작연도로 따져보니 대학 시절에 봤다는 계산이 나왔다. 한편이라도 빼먹을까 노심초사하며 온갖 극장을 섭렵하고 유치한 가십성 기사라도 영화에 관련된 것이라면 꼼꼼히 훑어보는 내가, 고작 10년 전에 커트 러셀이 누군지도 몰랐었다니…. 멋도 모르고 그렇게 봤던 <불타는 태양>이 그렇게도 강렬하게 내 뇌리에 남았던 이유들도 유치할 정도로 간단했다. 고양이 같은 눈동자를 가진 미셸 파이퍼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던 것이 그 첫 번째.
두 번째는 ‘왜 한글 제목이 <불타는 태양>이야?’라는 궁금증을 도저히 풀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갖가지 요소들을 아무리 분석해봐도, 한글 제목과 일치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영화 중간에 석양이 진하게 나오는 장면이 딱 하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억지스러웠다. 좀더 시간이 흐른 뒤에 접한 진짜 제목조차 속시원한 해답을 주기는커녕 나를 더 당황시켰다는 점에서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Tequila Sunrise>라니, 이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영어 단어만 알았을 뿐 술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식이 없었던 나에게, ‘데킬라’라는 단어는 거의 외계인의 언어영역이었던 셈.
이렇게 뭔가 애매한 것들이 한데 뒤엉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불타는 태양>이 DVD로 출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상하리만치 반가웠다. 무엇보다 DVD로 출시되기에는 확실히 예스럽고, 블록버스터도 아니며, 달리 뛰어난 면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이 영화가 출시됐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다. DVD도 신간 비디오처럼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양한 타이틀들이 술술 쏟아져나오는 상황으로 바뀌면서 생긴, 뜻밖의 수확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이 <불타는 태양> DVD 타이틀이 더 반가웠던 건 제작자의 오디오 코멘터리가 몽땅 한글 자막으로 처리되어 있어, 거의 케이블 TV에서 방영되는 외화 제작다큐멘터리를 보는 수준으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장장 2시간에 걸쳐 멜 깁슨과 커트 러셀의 자리에 해리슨 포드와 알렉 볼드윈이 거론됐었다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캐스팅 얘기부터,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제작자의 무궁무진한 당시의 뒷이야기들은 확실히 새로운 재미를 선사해 주었던 것. 그러나 DVD 치고는 조악한 화질에 매우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불타는 태양>의 경우처럼 내용면에서 상당한 재미와 흡인력을 갖추고 있는 영화들은, 보다보면 DVD이긴 해도 화질이고 뭐고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디지털 복원 기술을 등에 업고 출시되는 다른 DVD 타이틀들에 눈높이가 딱 맞춰져 있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 이 <불타는 태양> DVD 타이틀의 화질은 분명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너무 반갑고 좋긴 한데, 이게 뭐야…’라는 애매한 기분은 여전히 가시질 않는다.김소연/ DVD 칼럼니스트 soyoun@hipo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