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 감독의 영화는 수많은 말들로 만들어진다. <후아유> 때는 벤처사업에 뛰어든 20대 청춘을, <사생결단> 때는 마약세계를 둘러싼 형사, 제조업자, 판매자들의 증언을 발로 뛰며 귀담아들었다. 덕분에 그의 영화는 로맨틱코미디건, 누아르건 장르의 색깔보다도 시대와 공간의 체취가 먼저 드러난다. 그의 네 번째 장편영화인 <고고70> 또한 1970년대 고고클럽을 휘저었던 ‘로크’그룹 멤버들의 말들이 곳곳에 담겨 있는 영화다. 그들은 어떤 음악을 했는지, 당시의 청춘들은 그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결과적으로 한국의 70년대란 시대는 그들의 음악을 어떻게 발현시키고,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영화는 오로지 공연의 열기로 관객을 달구려 하지만, 최호 감독은 그런 열기조차도 수많은 사람들의 말들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는 ‘상상’ 이전에 ‘근거’를 세우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들이는 감독이다. <고고70>의 모태가 된 책 <한국팝의 고고학>의 제목을 빌리자면, 작품마다 새로운 분야를 뒷조사하는 고고학자인 셈일 것이다. 그가 <고고70>을 위해 캐내고 먼지를 털어 발견한 것들, 그리고 그 사료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고민했던 흔적들을 살펴봤다.
-그룹 피닉스의 음반이 재발매된다는 소식이 <고고70>의 발단이었다고 했다. 어떤 점에 끌린 건가. =사실 당시에 그런 ‘레전드’가 있었다는 건 내 또래 세대가 다 아는 부분이다. 친한 감독들 사이에서도 70년대의 고고클럽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김홍준 감독님의 말로는 그때 고고클럽에는 “공순이부터 대학생까지 있었다”고 하더라. 오승욱 감독한테도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 대화들에서 받은 느낌은 그처럼 골 때리는 시대가 있었다는 거였다. 정말 아이러니한 거다. 정부에서 워낙 못하게 하는 게 많은 상황인데, 한쪽에서는 부흥하던 게 있었다는 거지. 그런 부분이 매력적이었다.
-아이러니로 보자면, 70년대는 수많은 아이러니가 있었던 시대다. 음악적인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특별히 느낀 게 있나. =성기완씨가 그랬다더라. “한국 록의 정서는 쓸쓸한 뒤안길”이라고. 그 시대를 개념적으로 정리하면 근대화의 사회에서 이제 막 싹트고 만개하던 것들이 싹둑 잘린 거 아닌가. 특히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자양분이 되질 못하고 전수되지 못하는 게 너무나 많다. 이번에 자료를 찾으면서 보니까, 그 시절의 문화라는 게 지금 와서 보면 마치 남의 나라 것이거나, 혹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공란이 되어 있더라. 나뿐만 아니라 다른 감독들도 그런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을 거다.
-작품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들을 만났나. =<사생결단>에 비하면 이번에는 절약이 많이 됐다. 일단 신현준씨가 쓴 <한국팝의 고고학>이란 책이 큰 도움이 됐다. 생각보다 방대하고 구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과 스크랩들이 충실했다. 내가 뛰었으면 한 6개월은 뛰었어야 했을 것들이 집약되어 있더라. 신현준씨한테는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분 덕분에 데블스와 피닉스 멤버들도 만났고, 극중 이병욱 기자의 모델이었던 서병후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발품을 급하게 팔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을 만나면서 어떤 걸 느꼈나. =서병후씨는 지금까지 갖고 있는 기억력과 풍부한 지식, 변치 않은 철학 등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처럼 당시의 문화적인 맥락을 꿰똟고 있는 분이 재야에 묻혀 있는 게 그 시대의 현실이구나 싶었다. 내 사견일 수도 있지만, 그분들은 시대에 대한 피해의식 같은 게 있어 보였다. 수년 동안 자부심을 갖고 하던 일이 어느 순간 퇴폐로 몰리면서 쫓겨난 거니까.
-아무래도 그런 취재를 하다보면 미처 영화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많았을 텐데. =서병후씨의 첫마디가 이거였다. “그 시대에 대한민국에 마야문명이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그게 다 감쪽같이 잊혀져 있다는 걸 알아야 돼.” 그러고선 8시간을 쉼없이 이야기하시더라. 나름 과장도 있었겠지만, 이야기로 들은 그 시대의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 김추자씨가 얼굴을 난자당한 뒤에 붕대감고 무대에 올라가서 인사하고 내려왔다는 정도의 에피소드가 무궁무진했다. 와일드 걸즈가 등장하면 관객들이 그들이 탄 차를 번쩍 들었다느니, 그때 경찰들이 진압한다고 곤봉으로 사람을 쳐서 그 차에 피가 쫙 퍼졌다느니…. (좌중 폭소)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톤이다. 무협지나 마찬가지지. 그런 야사를 바탕을 들려주시면서 그분만의 팝의 역사를 술술 읊으시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확신이 들었다. 정말 그런 시대와 공간이 있었을 것 같더라.
-이야기를 구상할 때 처음 생각한 건 어떤 구조였나. 사실 전작이 가졌던 디테일들에 비해서는 이야기가 단순해진 느낌이다. =데블스와 그때의 환경을 규정했던 시대, 그리고 고고족, 이 3각의 이야기라고 봤다. 데블스를 선택한 건, 특별히 이들의 전기영화를 그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일단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시대였는데, 그처럼 자유로운 상상력이 가능한 시대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팀이 데블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3각의 구도를 짜놓고 고고족은 어떻게 등장했는가, 그 시절의 밴드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탄생했고 관객과 교감했는가, 그리고 시대적인 제약 속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미니멀하게 보자고 했다.
-엔딩 부분의 리사이틀은 어떤 의도였나. 결과물과는 달리 시대적인 제약 속에서 사라진 문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고민했을 것 같다. =그건 일종의 헌사다. 사실 그런 일은 없지 않았겠나. 목욕탕에서 그들의 뒷모습이 보이는 장면까지가 우리가 바라보는 70년대란 시대일 거다. 하지만 이미 임순례 감독님이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하셨기 때문에 그걸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이런 쓸쓸한 역사가 있었다고 보여주는 건, 내가 볼 때 영화적인 의미가 없었다. 또한 영화의 엔딩이 그렇게 가도 끝까지 ‘당시에 마야문명이 있었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거라고 봤다. 그래서 일부러 최루탄이 터지는 황당무계한 상황으로 몰고 간 거다.
-공연장면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어떤 컨셉을 갖고 연출했는지보다, 어떻게 준비했는지가 궁금하더라.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U2 같은 그룹의 공연실황부터 우드스톡, 롤링스톤스 다큐들을 참조했다. 다큐멘터리가 공연현장을 잡는 방식이 매력있더라. 그래서 일부러 기술적으로 센 장비는 안 쓴다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관객 위로 지미집이 지나가는 MNET 스타일은 하지 말자는 거였지. (웃음) 그것 때문에 김병서 촬영감독은 불만이 좀 있었는데, 대신 우리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놓고 가는 것으로 정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고고족들을 사실적으로 연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보조출연업체에서 나온 엑스트라가 소리만 지르는 걸로는 무리겠더라. 그래서 고고족도 전원 캐스팅하자고 했다. 뮤지컬이나 연극배우 출신들로 오디션을 본 뒤 캐스팅했는데, 그들 중에서도 1진과 2진이 있었다. (웃음) ‘고고족장’이란 이름으로 연출부 한명을 전담하게 해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시나리오를 읽히는 오리엔테이션도 했었다.
-극중 상규가 공연 도중 엄마를 찾으며 절창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멤버들 간의 싸움에서 이것마저도 쇼의 레퍼토리가 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간극에서도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것 같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관객에게도 잘 표현됐으면 좋겠다. 말하자면 고고클럽 시대의 양면성이다. 시대와 음악의 관계에서 더 들어가 디테일한 측면에서 매력적이었던 부분이다. 신현준씨의 글을 보면, 고고 열풍이 불고 고고족이 등장하고 그 안의 열기가 성황을 이루면서 결국에는 그룹들의 레퍼토리가 단조로워졌다고 하더라. 고고족이 난동을 부릴 정도였으니, 그 ‘필’에 어긋나는 밴드들은 오히려 욕을 먹게 된 거다. 록의 본질이 그건 아니겠지만, 당시 고고클럽의 운명이었던 것 같았다. 데블스의 리더인 김명길씨도 데블스가 인기를 끌면서 음악작업이 퇴보했다고 했다. 레퍼토리 만들 시간이 없으니까 했던 걸 또 하면서 그냥 가는 거다. 이건 로큰롤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봤다. 영화로 따지자면, 그 순간은 데블스가 하나의 밴드로서 정점을 치는 구간이다. 아마도 상규가 울컥하는 건 진실이었을 거다. 하지만 다음 논의로 가면 자기가 울컥할 정도로 그런 울림이 관객에게 먹혔다는 거다. 당연히 다음부터는 패턴으로 가는 거지. 그런 게 당시 밴드의 딜레마이자 숙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실제 조승우도 그 장면에서 ‘핑’ 가버리더라. 촬영현장 자체가 그냥 노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조승우와는 <후아유> 이후 두 번째 만남이다. 사실 <후아유>에서도 조승우는 로커였다. 게임 속 아이디인 ‘멜로’가 ‘별이’에게 거짓말로 내세운 직업이었으니까. 다시 만나보니 어떻던가. = 조금 어른이 됐다. (웃음) <후아유> 때만 해도 조승우는 스물한살이었다. 그 이후로 뮤지컬이든, 영화든 잘 성장한 것 같다. 단지 연기력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유연해진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거겠지. (웃음)
-데블스 멤버로 나오는 문샤이너스의 차승우와 손경호는 어떻게 발탁한 건가. =일단 연주가 되는 사람을 캐스팅하는 게 원칙이었다. 홍대에 있는 밴드들을 상대로 오디션을 봤는 데, 그때 캐스팅했다. 악기 연주하고 리딩하는 식이었다. 차승우는 70년대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 있었다. 또래들과 정서가 다르다. 문샤이너스에서 추구하는 음악도 초기 로큰롤의 스타일이다. 정서가 꽤 센데, 근거가 없는 것 같지도 않다. 차승우의 아버지인 차중광씨도, 조승우 아버지처럼 70년대 시절 음악을 한 분이었다.
-차승우가 연기한 만식은 영화에서 70년대란 시대 다음으로 중요한 갈등의 키다. 연기는 초보인데, 불안하지 않았나. =무지하게 불안했다. 도박이지, 도박. (웃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족한다. 물론 가장 만족하는 부분은 공연장면이 리얼해졌다는 거다. 홍대에서 차승우의 공연을 보면서 저렇게 매력적인 연주가 영화에 그대로 들어올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나머지는 그가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될 것 같았고. 그래서 음악하는 차승우와 영화 속의 만식이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정말 차승우는 실제 자기 말투를 가지고 무대에서 노래하듯 연기한 거다.
-지금까지 IMF시대, 벤처상장시대, 유신시대를 다뤘다. 또 호기심이 생기는 시대가 있나. =<고고70>을 막 끝낸 지금은 90년대 후반에 홍대에 있었던 펑크밴드들에 관심이 있다. ‘고고 2000’쯤 될까? (웃음) 내가 직접 겪었던 80년대는 개념이 잘 안 서는 것 같다. 하지만 90년대 말부터 한 1, 2년간의 시대는 드럭을 중심으로 어떤 커뮤니티가 있었던 것 같다. 차승우의 말로는 자폭의 과정을 거쳐서 없어졌다고 하지만 흥미로운 풍경이 있을 것 같다.
-2000년대의 청춘과 70년대의 청춘을 다 만나본 셈인데, 어떤 차이가 있는 것 같나. =<고고70>을 만들면서 청춘의 개념을 잡겠다거나 그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물론 나도 생각하고 있던 건 있겠지. 내가 85학번인데, 나도 꼰대가 된 건지 80년대의 20대가 지금보다 더 액티브했던 것 같다. 당시의 20대는 세상이 물리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변화가 있을 때면 거기에 일조한다는 관념으로 살았다. 지금은 지구적인 지형도가 달라진 것도 있겠지만. 내가 볼 때는 재미가 없어 보인다. 대학만 해도 자본주의의 시스템으로 들어가버리지 않았나. 영화를 만들면서 스탭들끼리 재밌어했던 부분이 있다. 이 영화가 제대로 된다면 이런 분위기에서 희한하게 찬물을 끼얹는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고. 말하자면 솔(soul)을 가져보자는 거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