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진짜 총보다 담배연기가 더 실감난다는 걸 알았지”
2001-11-14

촬영기술에 대한 다양한 고민, 특수효과, 시네마스코프, 칼라영화를 시도하다-이창근2

순사부장 이름은 내 지금도 안 잊었는데, 다나까라고. 그이를 찾아가서 엽총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총알은 빼고 내(연기)만 풀쑥 나면 되는 거니까 한 두어발쯤 안 되겠습니까.” 웅기는 북경과 가깝기 때문에 총소리만 나도 비상령이 내리고 군대가 동원되던 곳이다. 당연히 쉬울 수가 없는 것을 여관 주인하고 졸라가지고 두발 허가를 받아냈다. 탄환은 주재소에다 빼주고, 총구멍은 담뱃곽으로 틀어막고 촬영을 했다.

촬영 아주 잘되었다고 희색이 만면해서 돌아왔는데, 아 이게 에누지(NG)가 나지 않았어. 왜 에누지가 났는고 하니 촬영으로 따라온 한창섭이가 심통을 냈다. 현상준비 다 하고 기다려도 내놓질 않더니 필름없이 카메라만 거저 돌렸다는 거다. 평양서 떠날 때 오바 사입게 돈 팔원만 달라는 것을 내가 안 준 일이 있다. 노비가 모자라면 곤란하니 오바는 갔다 와서 사자고 달래논 것이 수가 틀린 모양이었다. 여관방에서는 배우들이 화가 나서 목침으로 때리갔다고 난리가 났지만도 뭐 다시 찍는 거밖에 도리가 없다 해서 주재소에 또 찾아갔다. “빠가야로!” 대뜸 군도를 빼서 위협이지 영 뭐 허가가 나지 않았다. 총구녁에서 연기만 ‘꽝’ 나면 이거 오아달(대히트)이 되갔는데 말야.

여관에 가만 누워서 궁리중인데, “옳지, 총구멍을 가깝게 찍자. 그 담에 방아쇠 댕기는 걸 가깝게 찍고, 그 다음에는 담배 연기 ‘휙’ 내불면서 총 구멍만 찍자.” 그때는 크로즈업인지 뭔지 모르지, 그저 ‘가깝게’ 찍자. 그게 감독의 아이디어였다고 참나. 찍어놓고 보니 엽총을 쓰는 거 보다도 오히려 연기가 ‘확’ 나가서 멋있었다. 극장에서 장면에 맞춰 스크린 뒤에서 불을 ‘쾅’ 뿜을 때는 정말 총알이 나가는 소리 같고 박수가 많이 나왔다.

비웃음을 무릅쓰고 발성영화 연구

다음에 만든 영화는 <죄지은 여자>(1934)다. ‘서항(西港)키네마’라고, 진남포서 젊은 사람 몇이 추작거리해가지고 발족한 영화사에서 요청이 들어와가지고 만든 작품이다. 주연, 조연만 자기들 클럽에서 맡고 촬영, 감독 내가 다 해주었는데 극장에서도 시시하다고 안 받아주는 영화가 되고 말았다. <죄지은 여자>에 실망을 하고, 이 보통영화로는 손님이 안 든다, 특수작품을 만들자 해서 <산유령>(山幽靈, 1935)을 준비했다. 유령이 나타났다 없어졌다하는 장면을 구상해가지고 백였는데, 그때는 페이드 인 아웃이 안 되기 때문에 하다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주춤하고 있는 새에 발성영화가 도래했다. 이건 발성영화라도 해야되겠는데 기계도 없고, 그러나 또 만들어보고 싶은 의욕이 있어서 착수해 가지고 꼬박 삼년 걸렸다.

처음에는 일본 마쯔다(松田)회사에 주문을 해가지고 발성하는 다마(녹음장치에 쓰이는 전구)를 사왔다. 삽십오원을 보내놓고 기다렸다가 그걸 소포로 받을 적에는, 몇달 밥 않고 굶어도 살 것 같았다. 이걸 뜯어서 내용을 봐야되겠는데, 어떤 책에서 읽기로 광선이 들어가면 폭발한다 하니, 이불을 씌우고서 포장을 뜯었다. 다른 데서는 어떻게 쓰는가, 일활(日活: 닛카쓰-일본의 영화사) 같은 데서도 암실 들어가서 다마를 장치해 가지고 나와서 촬영을 하는가, 뭐 삼십오원 베리드래도 확인을 해봐야 갔다 싶어서 이불을 확 제끼고 땀을 씻고는 설명서대로 삼백오십 볼트 전기를 넣었다. 파란 불이 깜빡깜빡깜빡. “아하, 이게 불이 깜빡깜빡 하면서 파동이 생겨서 녹음이 되는 거로구나.” 다음에는 암푸(앰프) 맨들고 마이크를 맨들고, 필름에다가 녹음을 해보고, 되는 방향으로만 자꾸 연구를 해가지고 기계가 완성이 됐다.

이제 녹음을 넣어가지고 영사기에다 둘러봐야 말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알 수 있을 텐데, 마침 박운삼이라고 동보극장의 부사장격으로 앉아 있던 친구한테 여러 번 폐를 끼쳤다. 첫 단계에서는 필름에 감광만을 씌워가지고 돌려봤다. 소리를 넣지 않고 돌리는데도 ‘삑’ 하는 노이즈가 났다. 가만 생각하니까 기계 자체에 진동이 있어서 발생하는 소리란 말야. 철판을 갖다가 움직이지 못하게 죄놓고, 이번에는 녹음을 한번 해봤다. 영사기에 둘러보니 ‘솩’ 하는 소리만 나지 ‘삑’ 소리가 없었다. 자신을 얻어가지고 말을 넣어보니 잡음은 없는 대신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가 나 다’ 하면 말이 똑똑히 나와야 할 텐데 ‘강하다’, 반벙어리 얘기하듯 한단 말야. 이런 발성을 가지고는 안 된다, 또 연구하고 연구해서 한 반년이 지났다. 주위에서 모두 하는 얘기가, 동경서도 쓰찌하시식(연구과정에 이필우가 동참하여 성공시켰던 발성시스템. 연구자 토교(土橋)의 이름을 따서 쓰치하시식이라고 이름붙였다.- 필자)이 하나 있을 뿐 모두 웨스턴인데, 한국서 네가 발성을 나게 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괜히 이러다 뼈만 남아 죽지 말고 고만 두라 말야. 나도 의심이 가지마는 생계에 위협받는 것도 아니고, 재정도 있고, 부모들이 막는 것도 아니고, 다시 한번 해보자 해서 <처의 모습>(1939)까지 완성시켰다.

양말공장을 스튜디오로 개조, 동시녹음 실시

박운삼이 하고 얘기가 돼가지고 유월 초나흗날로 동보극장에 개봉날을 잡았다. 그때 처음으로 사호짜리 포스터를 크게 했다. 그 전에는 예고라는 것도 없었고 스틸만 문에다가 붙여놓으면 그만인 것을, 인쇄 일을 보는 친구가 데자인을 해줘가지고 평양 시내를 도배하다시피 누볐다. 초나흗날 오후 한시가 1회고, 저녁 여섯시가 2횐데, 열시부터 극장 앞이 장사진을 이루더니 열두시에 벌써 꽉 차버렸다. 첫회 끝난 뒤에는, 또 보갔다고 변소간 들어가 숨는 놈까지 잡아내고도 꽉 차고 밖에는 한 칠팔백명 줄을 섰다. 1회, 2회, 3회 하고, 4회 밤까지 굉장했다.

발성영화를 시작하면서 영화사 간판은 ‘동양토키영화촬영소’라고 고쳐 달았다. 스타디오는 양말공장 하던 건물을 인수해 가지고 만들었다. 동시녹음에 대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식 방음장치를 본따서 바닥에 대패밥을 깔고, 벽에는 짚을 여몄다. 라이트는 전기를 끌어다가 천와트짜리 다마에 갓을 씌워서 비췄다. 스타디오가 백오십평 남짓하기 때문에 풀(full) 장면은 찍을 수도 없고, 또 입맞추기 하는 식으로 크로즈업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백 킬로 정도면 충분했다. 한 가지 애로는, 벽에 쌓은 볏짚 오라기에 들어온 쥐새끼들이 싸락을 먹느라고 ‘푸득푸득푸득’, 그것 때문에 한참 녹음중에 에누지를 많이 냈다.

대동아전쟁 무렵이 되자 한국에서는 더이상 영화를 할 수 없다는 총독부 공문이 내려왔다. 공문 받고 얼마 후에는 총독부에서 검열관과 기사 일행이 내려왔다. 조선에서는 영화를 할 수 없으니 기재 일체를 평가해서 총독부에서 사들인다는 것이었다. 코첼 1호, 2호, 녹음기 전부 내주고 이백원에 평가받았다. 내가 맨든 것들은 그렇게 해서 다 없어졌고, 외제라고 욕심을 부려가지고 <도회비가> 적에 한창섭이가 서울에서 들여왔던 유니바살 촬영기만은 몰래 남겨두었었다. ‘동양토키2가 문을 닫고, 해방까지 이년 동안 반공훈련으로 소일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해방 되자 노군(소련군)이 들어오고 적위대가 판을 치면서 우익은 전부 구금됐다. 들리는 말이 “다 총살당한다, 탈옥해 도망가자.”고 했다. 야반도주 해가지고 넘어온 것이 1948년이다.

현상에 열중한 말년

피난 내려와서는 생계를 위해 대구서 성냥공장을 했다. 내가 맡은 일이 국회 담당으로서, 세금 면제를 청원하기 위해 상경한 중에 지해성(제작자)씨를 만난 일이 있다. 서울에서는 벌써 국회에 영화법이 상정돼가지고 면세조치를 받고, 영화하기 제일 좋은 때가 됐는데 성냥공장은 뭐 하러 하느냐는 권유가 있었다(영화법이 공포된 것은 1962년의 일이지만,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전후의 사회적 안정을 배경으로 영화제작 편수가 꾸준히 증가하였고, 국산영화에 대한 특혜조치들이 내려졌다.- 필자). 그럼 뭐 하나 해보자 해서 얼마 후에 공장을 접고 올라왔는데, 지해성씨는 벌써 사무실을 차리고 <구원의 정화>(1956)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코첼3호’를 만들었다. 영화를 하려면 기계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54년도에 완성 해가지고 처음 만든 작품은 <건국 십년사>다. <인생화보>(1957) 만들고, <세 쌍동>(1959) 시네마스코프 하고, <투명인의 최후>(1960) 특수 촬영하고, 칼라영화 <마법선>(1969)까지, 그 기계로 죽 다 했다. 지금(이 인터뷰는 1977년에 이루어졌다.- 필자)도 내가 그걸 쓰고 있지마는 성능도 아주 좋고 ‘코첼’답게 잘 만들었다.

‘코첼’ 다음에는 현상기를 만들어서 현상에 주로 열중하고 있다. 한 너댓편 해줬는데, 현상시설을 내서 수입되는 돈은 그저 기계 맨드는 데 전부 집어넣고 좌우간 있는 대로 욕봤지. 그래도 딴 데서 수입해 올 것 같으면 사오천만원 먹는데 구백육십만원 먹었으니 아주 싸게 됐다.

나야 돈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착수해놓고 보면 중단할 수도 없고 되든 안 되든 완성은 봐야갔다는 끈질긴 정신은 있어서 그냥 취미 삼아 한다. 우리 집사람은 내가 그저 영화 하는데 빛을 못 보기 때문에 좋아라 안 하지만, 이제 영화로 일생을 마칠 사람이니까 이거 안 하면 할 것도 없고, 종신사업으로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으로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 이기림/ 동국대 대학원 연극영화과·이영일 출판프로젝트 연구원 marie320@hanmail.net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