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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F2008] 미지의 아시아영화: 필리핀과 카자흐스탄 영화의 약진
김성훈 2008-09-30

현재 동남아시아 지역의 영화들은 ‘개인’보다 ‘사회’에 주목한다.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지리적, 역사적 특성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 지역 영화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종교, 민족, 세대, 정치적 갈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필리핀영화와 (발리우드가 아닌) 인도의 사실주의영화가 눈에 띈다.

정면에 서서 당당하게 바라보는 카메라의 힘

서비스 Service 브리얀테 멘도사 | 필리핀, 프랑스 | 2008년 | 94분 | 아시아영화의 창

마닐라 시내에 있는 도산 직전의 낡은 성인영화 동시상영관. 이곳의 하루는 꽤 고단하다. 극장의 여주인 네이다는 아들 조나스의 학교 준비에서부터 극장 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할머니의 푸념, 아버지의 법정 변호사의 비용, 자신을 희롱하는 극장 벽의 성적 낙서, 극장 직원들간의 싸움까지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다. 카메라는 일관된 움직임으로 극장의 긴 하루를 세심하게 관찰한다. 가령, 카메라의 움직임은 네이다를 따라가다가도 극장 직원들이 매춘여성을 불러 섹스를 하는 장면으로 빠진다든지 극장 간판 화가의 애정문제로 자연스럽게 방향을 바꾸면서 극장의 구석구석을 살핀다. 즉, 1인칭 시점의 위치와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위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무엇보다 영화의 힘은 카메라가 대상을 정면에서 당당하게 바라본다는 데 있다. 극장 영사실 직원이 매춘여성과 근무 중에 섹스를 할 때, 카메라는 민망할 정도로 객관적인 위치에 있다. 게다가 네이다의 아들 조나스는 이 풍경을 정면에 서서 지켜본다. 이 두 장면이 교대로 충돌할 때, 관객은 이 풍경을 어떠한 감상도, 왜곡도, 동정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충격적이다.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네이다의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일해요”와 같은 푸념과 만났을 때, 정서적인 움직임은 극대화된다. 영화를 연출한 필리핀의 브리얀테 멘도사 감독은 첫 작품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직행하여 영화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종교분쟁으로 얼룩진 비열한 거리

살육의 시간 Firaaq 난디타 다스 | 인도 | 2008년 | 101분 | 아시아영화의 창

2002년 3월 인도 서북부에 위치한 파키스탄과 인접한 국경지역 구자라트주에서 2천여명이 죽은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이슬람교도들과 힌두교도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서로를 처참하게 죽인 종교분쟁. 영화는 이때의 사건 ‘1천개의 실제 이야기에 기초를 둔 픽션이다’라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야기는 세 가족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한 가족. 집에 돌아오자 모든 것이 화재로 날아가 절망하는 부부. 아내는 남편에게 헤나(인도 문신)를 해서 돈을 벌어오겠다고 선언한다. 두 번째 가족. 당시 학살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로 환청이 들리는 아내. 그녀는 그때의 안 좋은 기억을 잊기 위해 뜨거운 식용유를 팔에 붓는 습관이 생겼다. 이때 그녀 앞에 이슬람 소년 모한이 나타난다. 세 번째 가족.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델리로 가려는 부유한 젊은 부부. 감독은 세 이야기를 통해 당시 사건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세 가족이 아닌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모슬렘 소년 모한이다. “너의 이름은 뭐니”라는 질문에 이슬람 언어인 자신의 이름 ‘모한’이라고 답하는 것은 그에게 곧 죽음과도 같은 것. 그만큼 거리는 비열하다. 영화의 마지막, 모한은 눈앞에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다. 카메라는 모한의 충격받은 표정을 클로즈업하여 길게 보여준다. 모한의 눈에 비친 이 살벌한 풍경이 바로 오늘날 부조리한 인도 종교분쟁의 모습이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

남쪽 바다의 노래 Songs From the Southern Seas 마랏 사룰루 | 카자흐스탄, 프랑스, 독일, 러시아 | 2008년 | 82분 | 아시아영화의 창

“아기 머리가 왜 검은색이지?”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며 재차 묻는 러시안 이반(블라디미르 야보르스키). 그는 아내 마리아(이리나 아게치나)가 산후조리를 마치자마자 옆집의 카자흐스탄인 아산(드자이다르벡)과의 아기가 아니냐며 구타한다. 이반의 의심이 깊어질수록 옆집 아산 부부와의 관계는 멀어진다. 15년 뒤, 그의 아들 샤샤는 말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만큼 장성했다. 이반은 “왜 학교에 안 가고 말만 타냐”고 괜히 아들을 못마땅해하고, 아들 역시 “저에겐 이게 더 중요해요”라고 자신에게 애정을 쏟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한다. 스스로 가족, 이웃 사이에 벽을 세워 삶에 의욕을 잃은 이반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로부터 가족의 뿌리(역사)에 대해 듣는다.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마랏 사룰루 감독이 카자흐스탄에서 만든 이 영화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혈연을 중요시 여기는 중앙아시아의 모습을 진지하게 담아낸다.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지리적 특성만큼 자신의 혈연공동체에 대한 집착도 강한 법. 하지만 이런 사회풍토를 두고 할아버지는 아들의 머리색에 집착하여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이반에게 “함께 살아가는 태도가 중요하지 피부색이나 종족은 중요하지 않단다”라고 일침한다. 배우들의 훌륭한 앙상블 연기와 더불어 국내에 다소 생소한 카자흐스탄의 광활한 자연풍경을 보는 것도 영화의 또 다른 재미다.

시공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멜로드라마

6월의 이야기 A Moment In June 오 나타폰 | 타이 | 2008년 | 106분 | 뉴커런츠

세 커플이 있다. 1999년 방콕발 치앙마이행 기차 안에서 힘겨운 이별 준비를 하고 있는 두 남자 파콘과 콩. 같은 해 타이 람팡 놀이공원에서 27년 만에 재회하는 노(老)커플. 그리고 극중에서 파콘이 연출하는 1972년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 속 불륜 커플. 영화는 세 커플이 관계를 유지, 회복하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그린다. 이처럼 각각 다른 커플들이 등장하는 설정은 전형적인 옴니버스식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외형과는 달리 극이 전개될수록 인물들간의, 시대간의, 무대와 현실의 경계들이 서서히 허물어진다. 그 중심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변하는 촬영이 있다. 특히 그것은 연극 무대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처음에는 롱숏(Long Shot)으로 무대와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여 보여주다가 이야기의 전개와 감정의 흐름에 따라 카메라가 무대 위의 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게다가 감독은 무대장면을 실제 로케이션 장면으로 연출하여 의식적으로 무대라는 공간을 지운다. 이런 식으로 무대와 현실의 공간적 경계를 무너뜨린다. 동시에 연극 속 불륜 커플과 노(老)커플이 겹치면서 무대 위의 1972년과 현실의 1999년 사이의 시간구분마저도 허문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에게 새로운 시공간의 영역으로 안내한다. 이처럼 독특한 구성의 멜로영화는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의 지원을 받아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