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영화는 해프닝들의 연속이다. 식물처럼 살아가던 한 여자가 불쑥 타인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하게 되거나, 전혀 별개의 삶을 살 것 같았던 사람들끼리 타지에서 엮이거나, 명백히 약속이 있던 저녁에 느닷없이 생판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겪고 오기도 한다. 계획했던 일보다는 우연찮게 벌어진 상황들이 이어져 어느 순간 이전과 달라진 삶의 모습을 알아차리게 한다는 것이 그의 영화들이 가진 매력이다. 의외의 시공간과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만남과 인연들을 즐겨 다루는 그는 “그런 일이 내 삶에서 실제로 벌어질 거란 생각은 잘 안 하지만, 기대감 자체는 좋아한다”고 말했다. 옛 애인에게 꿔준 돈 350만원을 돌려받으러 간 여자의 하루를 그린 <멋진 하루>는 그런 기대감이 가장 긍정적인 색깔로 충만한 영화다. <애드리브 나이트>를 원작 삼았던 <아주 특별한 손님>(2006)에 이어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을 다시 한번 각색한 이번 영화의 작업 과정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가 있던 날, 서울 강변의 오후는 <멋진 하루>의 희수와 병운이 함께했던 날처럼 볕이 좋았다.
-<아주 특별한 손님> 때 이미 <멋진 하루>의 영화화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각색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지난해 초다. 영화 들어가자고 제작쪽하고 합의한 뒤 회의를 많이 했다. 각색 방향에 대한 회의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어느 선까지 고치고, 어느 선까지 살리느냐를 고민하는 데 거의 3∼4개월 걸린 것 같다. 러프 원고가 나온 건 지난해 여름이다.
-전작들에서 시나리오 작업은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건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른 데서는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내 경우는 촬영 전 완고까지 짧게는 한달, 길어도 두달 정도로 기억한다. 이번엔 고민하는 것부터 쓰는 것까지 6개월이 넘게 걸렸다. 워낙 원작이 있고 그게 탄탄한 이야기를 갖고 있으니까 굳이 작업기간을 길게 잡을 필요가 없는데 이번 영화 는, 그거 역시 원작이 좋지만, 그걸 영화로 옮기는 과정 자체에 예전보다 훨씬 복잡한 콘텐츠가 있는 것 같았다. 고민을 많이 했어야 했다.
-어떤 복잡한 콘텐츠였나. =상업적 고려가 좀 있었던 것 같고. 상업적이라 그래서 대단할 건 없지만, 그렇게 보여줄 거리와 나름의 계획성있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들. 처음엔 그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금방 할 줄 알았다. 스토리 심플하고, 밝고. 툭툭 던지듯이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더 어렵더라. 밝은 이야기에다 대중에게 친숙한 코드도 적당히 버무려서 가려면 확실히 그건 굉장히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이전엔 하지 않던 고려를 한 셈인 듯하다. =상대적으론 그렇다.
-다이라 아즈코의 원작은 주인공 여자가 옛 남자친구를 찾아가 그로부터 꿔간 돈을 받는 여정 자체가 핵심이다. 옛 애인을 쫓아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는 여자의 태도도 적극적이고. 그러나 영화에서 희수는 병운과의 여정을 내내 꺼리고 있고, 여정에서 강조된 것도 둘의 관계 자체다. 각색의 포인트를 어떻게 잡게 됐나. =원작을 해치지 말자는 게 우선이었고 그것에 플러스 알파의 해석을 내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멋진 하루>는 내가 즐겁게 봤기 때문에 그 즐거운 마음을 담는다고 생각했다. 이 원작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날 오후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잠시 착각하게 만들더라. 세상은 되게 재미있는 곳이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것 같고, 혹은 내가 남에게 이런 일을 해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즐거운 상상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작자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고, 다만 원작은 단편이기 때문에 그 많은 이야기를 다 담지 못했을 거고, 그렇다면 영화로는 가능할 테니 그 부분을 내가 대신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의 관계를 디테일하게 상상하는 것들이 즐거웠다.
-영화는 관객에게 둘의 현재를 통해 과거를 유추하게끔 한다. 영화적으로는 흥미로운데 상업적인 고려를 생각하면, 친절한 설명 방식은 아니고 정보도 적은 편이다. =원래 더 많은 장치들이 있었는데 다 잘라내고 최소한의 장치들만 남겼다. 각색 당시엔 관객에게 지금보다 더 친절하게 보여줄 생각도 있었다. 근데 각색하면서 오히려 줄여간 경우다. 너무 많이 알려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궁금하게 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또 보다보면 짐작되는 부분들이 있으니까. 몇 가지만 알려주고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기로 한 거다. 우리가 어떤 두 남녀의 관계를 잘 몰라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만 보면 짐작가는 관계란 게 있지 않나. 그들의 관계가 지금 단절됐는데, 어떤 마음에서 어떤 마음으로 옮겨가느냐가 중요한 거지 그전에 어땠느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고 봤다. 이 스토리가 어떻게 되는 거냐면, 희수가 병운에게 “돈 내놔” 하는 순간에서 마지막에 둘이 헤어지는 순간까지, 두 사람이 이렇게 사랑하다 헤어지지 않았을까라는 걸 뒤집어놓은 거다. 역순으로 보여주는 거지. 둘이 돈 받으러 다닐 때 초반에는 골프장, 고급 아파트 등 희수에게 불편한 공간들이 나오다가 점점 친숙한 장소로 넘어간다. 그리고 교통수단을 없애고 둘은 함께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탄다. 비가 내리기도 하고. 그렇게 힘든 하루를 함께 보내면서 희수의 감정에 변화가 생기고, 그들이 한때 이렇게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은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다.
-희수를 변화시키는 병운의 캐릭터는 원작의 도모로보다 더 순수한 인물이다. 도모로는 바람을 피우는 유부남이다. 엄연히 가정이 있고, 그 가정으로 안전히 돌아가고, 성격도 다소 복잡한 편인데 병운은 그렇지 않다. =그게 아마 시나리오 초기 단계에서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병운이 과연 어느 세계에 속한 사람이냐, 어느 선상의 사람이냐를 두고 생각이 많았다. 누구의 주변에나 있을 것 같은 아주 현실적인 부분을 만들어주되, 실제로는 과연 있을까 싶은 모호함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도연씨와 정우씨에게도 얘기했지만, 병운이란 인물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인물일 수 있다. 힘든 상황 속에서 희수의 마음에 생긴 하나의 엉뚱한 이상향이랄까. 하루쯤 일탈해서 자기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겪는데,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시작하게 된 거다. 근데 경험하고 나니까 결말이 그리 나쁜 것 같진 않은. 그런 것을 현실화해준 요정인 거지.
-예전에 얘기했듯 ‘팅커벨’ 같은 존재인가. =그런 셈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심리는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뜻하지 않은 여행이랄까. 근데 누군가가 인도자가 되어주는 거다. 그리고 그게 되게 엉뚱한 사람인 거지. 그런 이야기에 내가 매력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동화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스스로 그런 식의 엉뚱한 여행을 꿈꾸는가. =그렇다. 당황을 많이 하는 편이고. 아마 희수랑 비슷할 거다. 희수가 남자라면 나와 비슷할 것 같다. 신경질적이고, 현실이 되게 싫고. 도피를 하자니 용기도 없고. 그래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못 이기는 체하며 일탈을 생각하지. 물론 그런 경우가 내겐 실제로 거의 없었지만. 아니면 현실에서는 그런 일탈이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게 되겠지. (웃음) 그러니까 이 영화가 갈 길은 명확하다. 따뜻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마시멜로 같은 따뜻함이 아니라, 보다보니 따뜻한 것처럼 느껴지고 사람 사는 냄새도 좀 나고. 행복해지는 것 같기도 한 기분.
-영화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넌 변하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희수는 부정적인 의미로 “넌 어쩜 그대로니”라고 하고 병운은 긍정적 의미로 “이제 보니 하나도 안 변했네”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지지하는 건 병운쪽의 해석이다. 얼마나 까칠한 성격인지 알면서도 병운은 희수에게 “넌 변하지 마라”라고 하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게 나쁜 의미로 들리지 않았다. 변했어, 라는 덴 원래 부정적 의미가 많지 않나. “너 변했어”라고 하면 ‘너 예전엔 좋았는데 지금 후져졌어’라는 뜻이거나 ‘너 지금 좋아졌는데 예전에 엄청 나빴었어’라는 뜻일 테니까. “넌 여전하구나”라고 말하면 그게 제일 좋은 의미를 담는 거 아닐까. 예전에도 네가 이런 모습이었기 때문에 너랑 가까웠던 건데 지금도 넌 그런 모습이구나, 하는 의미가 아니겠나 싶다.
-디지털로 촬영했다. =<아주 특별한 손님> 이후 두 번째로 썼다. 사실 디지털은 너무 빨리 변화하고 있어서 한 기기에 적응하고 나면 또 새로운 게 나와 있고, 그래서 분명 필름에 근접한 효과를 낼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기능을 다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좀 서운한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디지털의 장점을 100%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많이 (필름과) 같아졌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필름에 대한 압박감을 떨칠 수 있어서 배우나 스탭들의 협조만 입다면 감독 입장에서는 굉장히 많은 걸 시도해볼 여지가 있다. 내가 영화 찍는 스타일이 배우들에겐 굉장히 피곤한 종류인데, 신을 구성하는 장면들을 한 테이크로 다 붙여 찍고 그걸 또 여러 각도로 찍으니까 만약 필름을 쓴다고 하면 양이 어마어마해지는 거다. 그리고 확실히 기동성이 좋았다. 따져봤더니 우리 영화의 로케이션 개수가 70개에 가깝다던데 그걸 40일간 돌아다닌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루에 두곳씩 다니면서 매 장소에서 상황을 종료하려면…. 남들이 ‘이렇게 빨리 찍어도 되나’ 우려할 정도로 빨리 찍었다. 내가 빨리 찍는 편이기도 하지만. 여튼 그런 면에서도 디지털이 적합하지 않았나 싶다.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을 찍는다는 것도 엄청난 고통이었다. (웃음) <아주 특별한 손님> 땐 배경 계절이 (밤이 짧은) 여름이었는데 밤신으로만 찍었고, 이건 해가 짧은 겨울을 배경으로 낮신을 찍었으니. 빛을 맞추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아침의 느낌, 오후의 느낌, 해가 기우는 느낌, 석양. 그런 것들이 인물들의 여행과 감정의 정화와 모두 맞물린단 점에서 고민이 아주 많았다. 촬영팀이 연구를 많이 했다.
-어느 규모로 촬영했나. =본 촬영은 37회. 기간으로는 9주였다. 기타 촬영 3회 포함해서 40회 촬영이었고, 촬영한 날수로는 40일이다.
-리허설을 많이 했나. =아니. 리허설은 별로 없었다. 전도연을 데리고 리허설을 할 수가 있나. (웃음) 아니, 할 필요가 있나.
-<아주 특별한 손님> 당시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집(<멋진 하루>)에서 세편을 영화화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나머지 한편의 영화화도 차기작 계획에 있나. =여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소설집 안에 있는 모든 단편이 다 영화로 가능한 이야기다. 그중 나의 1순위가 <멋진 하루>였고 2순위가 <애드리브 나이트>, 3순위가 <맛있는 물이 숨겨진 곳>이다. 단편 <맛있는 물이 숨겨진 곳>의 내용은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가 성형수술하고 난 다음에 옛날에 자기가 좋아했던 남자와 재회하는데 남자가 자신을 기억 못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그 남자는 힘든 상황에 처해 있고, 이것도 돈에 관한 이야기다. 만약 <맛있는 물이 숨겨진 곳>까지 영화가 되면 정말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거다. 한 사람의 작품을 세개나 영화로 만드는 셈이니. 이 작가가 내가 좋아하는 코드를 갖고 있다. 소박함이 맘에 들더라. 겉멋 들어서 쓰는 소설이 아니고, 철학을 강요한다거나 일본적인 트렌드를 좇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 오면 그 상의도 할지 모르겠다. 당장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번 영화 보고 맘에 안 든다 그러면 못하는 거고. (웃음) 자막도 없는 영화를 보러 오신다는 게…. (웃음) <아주 특별한 손님> 때 작가가 그런 얘긴 해주시더라. <멋진 하루>는 일본에서도 영화 제안이 있었다는데 <애드리브 나이트>를 갖고 영화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누가 이렇게 무모하게 영화를 하려고 하나. 이게 영화가 되기나 할까. (웃음) 그때, 속는다고 생각하고 판권을 넘겨주셨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