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준을 영화진흥위원회 전 사무국장이라고만 소개하는 건 충분하지 않다. 1990년대 스크린쿼터감시단, 한국영화연구소 등을 거쳐 최근까지 영화진흥위원회에 몸담았던 그는 ‘한국영화’라는 브랜드를 되살린 주인공 중 한명이다. 다만 그늘에서, 뒤편에서 묵묵히 정책 연구를 담당했기 때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지난 10년 동안 나왔던 수많은 한국영화 정책 중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있기나 할까. ‘잃어버린 10년’을 운운하며 “특정 세력의 영화인들이 모두 해쳐먹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는 이들이 그를 ‘공공의 적’으로 지목하는 것 또한 무리는 아니다. 영진위 사무국장직을 그만둘 때 그의 아내는 귀농을 권했지만, “아직은…”이라고 망설였던 김혜준은 현재 창조산업연구원이라는 또 다른 둥지를 만들어 한국영화에 정책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아직 미련이 많은가보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할 몫이 이곳에 여전히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국회의원 최문순 의원실 등과 같이 9월9일 국회 헌정기념관 강당에서 ‘미디어 융합시대, 문화콘텐츠 진흥 정책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토론회를 시작으로 또다시 정책연구에 돌입한 김혜준을 만났다.
-영진위 사무국장직을 그만둔 지 100일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나이 마흔에 낳았으니까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이다. 손을 굉장히 많이 타는 시기지. 몸이 약해서 공 차라고 구립체육센터에 보냈는데, 쉬면서 같이 가서 한 시간씩 축구도 하고, 도서관도 같이 가고 그랬다.
-누구나 좋은 부모가 되고 싶지만 막상 아이와 함께한다는 것이 쉽진 않다. =결혼 뒤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않았다. 그러다 뒤늦게 아이가 생기니까 덜컥 겁이 났다. 그전까지만 해도 재밌게 사는 법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사나 싶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학교 다닐 때도 잡기는 전혀 몰랐으니까. 그러다 아이에게 적극적인 아버지가 되려면 뭘 좀 배워야겠다 싶어서 수영장에도 다니고 그랬다. 아이 때문에 삶의 가치가 많이 바뀐 거다.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었는데 연애는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낭희섭씨가 하던 독립영화협의회의 초대 사무국장으로 있었다. 그러다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같이 일하게 됐고, 그때 프러포즈했다. 같은 동네에서는 연애하면 안 되던 시절이었는데. 결혼까지 한 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고. 내가 성실하긴 하다. 포기를 잘 안 한다는 게 내 장점이니까. (웃음) 1년 전부터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데 월반할 정도로 실력이 일취월장은 아니지만 개근상은 꼭 받는다.
-영진위에서 10년 가까이 일했다. 나올 때 많은 생각이 교차했을 텐데. =이제 폭넓게 볼 수 있겠구나 싶더라. 영진위에 있으면 그때그때 사안을 판단하고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사전에 준비를 하지만 여러 변수들이 동시에 터져나오니까 길게 시간을 갖고 이렇게 저렇게 따져볼 여유가 많지 않다. 바깥에서 안면몰수하고 냉정한 비판을 해주면 되는데 그런 경우도 많지 않고. 전모를 이해하면서 정곡을 찌르려면 정보를 많이 갖고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데 바깥의 주문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영진위는 들여다보려면 안이 보이는 투명한 조직이고, 영화계와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조직인데도 말이다 .
-연임할 수 있었다면 했겠나. =아니.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타성에 젖는 측면도 있고. 안에서 공격적으로 뭘 하는 데도 한계도 있고. 바깥에서 영진위 안에 있는 사람들과 좋은 의미로 연계하되 영진위 안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싶었다. 윤활유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거지. 결과적으로 지금은 다른 입장과 처지 때문에 각자의 길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됐지만.
-영진위를 나온 뒤에 만나는 사람들도 좀 달라졌을 것 같다. =영화계 바깥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가 가장 궁금했다. 그게 알고 싶어서 희망제작소 아래 간판문화연구소에서 자원활동가 비슷하게 석달 동안 일했다. 어지러운 간판이 도시경관을 많이 해치잖나. 간판에 대한 가게 주인의 생각도 물어보는 등 인터뷰도 하고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영화쪽에 내가 함몰되어 있진 않았나 자문하게 되더라. 사무국장 시절에도 다른 분야 사람들을 만날 수는 있었지만 고작해야 아침 같이 먹는 정도이고. 이번처럼 벽없이 세상 이야기 들을 수 있었던 건 아니니까.
-희망제작소 경험이 영화정책가로서 어떤 힌트를 준 것인가. =창작자들은 일상적으로 사람을 만난다. 그러나 정책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제도 안에서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파격적인 시도를 하기도 쉽지 않다. 그에 비해 희망제작소는 신선하다. 우리 같으면 일반론을 펴는데 그들은 구체적으로 접근한다. 시골 군 단위까지 내려가서 그 동네 분위기와 환경이나 여건에 맞게 만든 아이디어들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온다. 스펙트럼 혹은 주파수 대역 안에서 일해야 했던 입장에서 보면 혁신적인 거지.
-새 사무실은 얻었나. =알아보고 있다. 일산 원당 근처에 알아보고 있다. 최근에 영화사들이 이쪽으로 가는 분위기이기도 하고. 경기도쪽에서 용역이 좀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자금은 충분한가. =한파를 견디겠다는 각오는 충분하다.
-함께 일할 연구원들은 다 뽑았나. =열심히 모으고 있다. 아마 1/3은 다른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정권이 바뀌거나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면 정책적으로 훈련된 많은 젊은 인력들이 도태된다. 과거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보좌관들 중에 전문적인 영역에 대한 갈망이 많은 친구들이 이미 결합한 상태다.
-주로 무슨 연구를 하나. =순수 연구 지향은 아니다. 기획 작업도 겸한다. 이를테면 한·일간의 영화 공동투자와 관련한 기획, 자문 등이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촬영단지 조성을 비롯해 방송, 음악 등 다른 분야와 함께 펼칠 사업들도 준비하고 있다. 연구는 연구대로 가고, 이슈는 이슈대로 다룬다는 게 원칙이다. 정책적 대응에만 매몰되지 않겠다는 거지. 사실 영진위 내의 정책연구소도 여기저기서 요청한 일을 수행하다 보니 연구 기능을 충실히 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9일 토론회에서 ‘미디어 융합시대, 문화콘텐츠 진흥 정책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한다. =영화와 방송 그리고 정보통신은 연계되어 있지만 정책적으로는 다른 분야처럼 되어 있다. 다르지 않은데 따로 다루는 거다. 더이상은 그런 방식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본다. 프랑스는 80년대부터 프로덕션 쿼터를 운용하고 있는데, 방송사에 영화제작 기금을 내게 하거나 직접 투자하게끔 한다. 영화사들의 경우 협상력이 떨어지니까 중간에서 CNC가 개입하는 형태다. 방송사가 자체 판단에 따라 영화에 투자할 수 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알아서 하라가 아니라 정책적인 개입과 유도를 통해 지원이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일본의 많은 독립다큐멘터리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재분배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영진위에 있을 때 방송영화제작지원 제도를 만들고 그것과 연계해서 방송 편성 뒤 융자제도 등을 구상하긴 했지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진 못했다. 지금 당장 방송사에 매출액의 일부를 내놓으라고 할 순 없겠으나 정책적인 단계서부터 소통이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보통신기금이나 방송발전기금의 일정액을 영화 콘텐츠쪽에 지원하고 재분배하는 다양한 방식을 토론회에서 제안하려고 한다. 영화계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집요하게 고민해야 한다.
-제한상영가 등급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정에 따른 제도 정비와 대안적 등급분류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제한상영관이 전무한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풀어낼 것인가, 제한상영가 등급의 기준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시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사실 헌법재판소와 같은 보수적인 곳에서 이와 관련해 위헌,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이 지금까지 벌써 몇번인가. 제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이 같은 결과가 반복되어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보상할 만한 가치’라는 개념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본다. 적나라한 성적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오직 자극만 추구하는 영상물과 충격을 통해 고민하게 하는 예술영화와는 기준을 달리해서 봐줘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영화가 뭔데, 예술영화가 과연 존재하긴 하느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합의할 수 있는 수준은 분명 있다. 보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들의 경우 예술영화전용관, 영화제 등에서 상영할 수 있게 하거나 광범위한 상영기회를 주기 위해 18세 등급과 제한상영가 두개의 등급을 부여하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 검열 논란을 불러올 수 있지만, 내 입장에선 이것 자체를 검열이라고 말할 순 없다고 본다. 중요한 점은 예외의 폭을 현실적으로 충분히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4기 영진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텐데. =떠도는 말만으로 발언하는 건 자제해야 한다. 사업계획안이 공개되면 과거와 다른 뭔가를 얼마나 담았는지 드러나겠지만. 다만 우려를 전하는 이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강 위원장의 경우 3개월 뒤면 생각이 달라지고, 6개월 뒤면 또 달라질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는 길지 않을 거라고.
-정책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나설 경우 외려 정책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는 뜻으로 들린다. =영진위 사람들은 두 가지 일을 하는 존재다. 굉장히 복잡한 이해관계를 추슬러서 ‘이 정도면 동의하시겠습니까’라고 하거나 아니면 영화계에서 이것이 우선순위는 아니니까 요청은 받았지만 ‘이번에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라고 정리를 하는 것이 하나다. 둘째는 영화계 입장에서 힘있는 이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영상미디어센터의 경우 왜 그 비싼 동아일보 일민미술관에 들어가 있느냐며 기획재정부가 이사가라고 했다던데, 그런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은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 영진위가 추진할 계획이라는 아시아무빙이미지센터를 선배 세대 영화인들은 복지공간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환경에서 그건 용인될 수 없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립서비스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것을 뒤섞으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심플하게 타깃을 분명히 해도 될까 말까인데.
-사달이 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장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작은 규모지만 미디어센터와 시네마테크와 독립영화전용관을 한데 묶어서 꾸릴 수 있었다. 3기 위원회에서 예산을 따내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 아시아무빙이미지센터에 포함되면서 집행을 못하고 있지 않나. 영화진흥정책이 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정책은 아니다. 누가 생각해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해선 안 된다. 우연하게 그런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그건 노려서 가능한 결과가 아니다. 정책은 포퓰리즘적 접근으로는 안 된다.
-사무국장 시절 사용했던 컴퓨터가 어딘가로 보내졌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더라. =국정원에 갔다는 말도 있다. 웃을 수밖에. 뒤져보면 뭔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나보다. 과거 사무국장 재직시에도 비슷한 일이 있긴 했다. 검경에서 내 뒷조사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때도 웃기는 해프닝이었다. 과거 공안정권에서 조직사건 조작하듯이 이미 영진위를 그만둔 문성근이라는 눈엣가시를 중심으로 계보도를 만드는 거지. 거기에 포함된 것인데, 당시 15억원 규모의 통합전산망 사업을 꾸리고 있던 때라 뒷돈을 챙겼을 것이라는 자신들의 비뚤어진 시각으로 평상심을 잃고 일을 벌인 거다.
-현실적인 대안을 중요시하는 정책연구가로서의 소신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을 것 같다. =회색주의자 뭐 이런 거지. (웃음) 내게 앙금을 가진 이들도 분명 있다. 이를테면 멀티플렉스 스크린 독점의 경우 법적인 규제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나는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형 유통 할인점들이 동네 상점들을 모조리 다 죽이는 나라에서 유독 멀티플렉스에 다른 논리를 강요할 수 있는가. 동네 상점들에서 물건 사면 마일리지 챙겨주는 미국이 아니잖나. 사회통념이 중요한데. 프랑스처럼 멀티플렉스가 들어설 때 기존 상권을 침해할 경우 불허하는 것도 아니고. 개발주의 아래서 모든 것이 용인되지 않나. 영화산업이 영화관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다른 미디어와의 관련 속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크린쿼터도 좀 그렇다. 스크린쿼터는 지켜져야 한다고 원칙을 확인하되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영진위는 다른 궁리를 할 필요가 있었는데 너무 매몰됐다. 불법 다운로드와 같은 사안에 좀더 빨리 대응했어야 하는 아쉬움도 있고.
-책을 펴낼 계획은 없나. =지난 20년을 정리할 책임을 느끼라는 주문이 있긴 하다. 방식은 여러 가지다. 내 주장을 담은 책일 수 있고, 과거 나온 성명서와 그에 대비되는 당시의 주장을 모아놓은 자료집일 수도 있고. 이런 작업은 때를 놓치면 굉장히 어려워지는 일이다. 지난 10년간의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과 실패한 영화들을 곰곰이 따져보고 싶기도 하고. 영진위 부위원장인 심상민 교수가 주장했던 퍼블릭 마켓처럼, 영상도서관이나 라이브러리 개념으로 공공성을 풍요롭게 하고 더 나아가 상업영화 영역까지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연구해보고 싶고.
-할 일이 태산이다. =그러게. 잘 놀 줄 몰라서 그래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