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 스토리>와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과 <라따뚜이>. 픽사 최고의 흥행작들은 모두 이 사람의 손을 거쳤다. ‘미다스의 손’을 가진 이 사람은 바로 픽사의 아트디렉터와 프로덕션디자이너를 맡고 있는 랠프 이글스턴이다. <월·E>의 프로덕션디자이너이기도 한 그는 8월22일부터 23일까지 이틀간 서울 SETEC 국제회의장에서 열리는 ‘픽사 애니메이션 제작자 초청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인터뷰 장소였던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픽사 20주년 기념전>을 진행 중인)에서 그는 단연 인기였는데, 한 애니메이터 지망생은 멀리서부터 그를 알아보고 다가와 말을 건넸고, <라따뚜이>를 좋아한다는 어린이 관객은 이 애니메이션을 만든 아저씨와 사진을 찍고 싶다며 포즈를 취했다. 하와이언 셔츠를 입은 랠프 이글스턴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들의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픽사에서 언제부터 일하게 됐나. =1992년부터다. 그 이전에는 <어메이징 스토리> <가필드> 등의 만화에 애니메이터로 참여했는데, 픽사에 있던 친구가 내 얘기를 존 래세터(픽사의 창립멤버)에게 했다고 한다. 픽사쪽에서 포트폴리오를 보내라고 연락이 왔고, 그로부터 2주 뒤 나는 픽사의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애니메이터를 꿈꿨나. =(단호하게)어렸을 때부터다. 나는 <벅스 버니>와 디즈니 만화의 광팬이었다. 더 정확한 시점을 말하자면 열살 때 누나와 함께 극장에 가서 <신데렐라>를 봤는데, 바로 그 순간부터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었다.
-아트디렉터와 프로덕션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각각 어떻게 다른가. =차이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프로덕션디자인은 애니메이션의 골격을 완성하는 것이고, 아트디렉팅은 그 골격 안의 세부적인 요소를 결정하는 일이다.
-아트디렉팅, 즉 애니메이션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설명해달라. =어떤 애니메이션이든 반드시 연구를 폭넓게 해야 한다. <니모를 찾아서>를 만들 때는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물고기의 종류와 생김새가 얼마나 다양한지, 움직임은 어떤지 관찰했고 시드니항구의 구조까지 연구했다. 아트 부서는 이렇게 모은 자료 중에서 예술적으로 취할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월·E>를 예로 들자면 우주선 연구를 하다가 우주선에 유난히 그림 표지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영화에 적용했다. 우주선에는 국적이 다양한 사람들이 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인이 언어가 아닌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더라.
-<월·E>의 제작은 다른 작품과 비교해 어땠나. =이제까지 만들었던 작품 중에서 가장 힘들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줄거리가 많이 수정됐고, 대사없이 이미지만으로 이야기를 끝어가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관객이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을 많이 했다. 이에 대해 제작자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려웠다.
-힘든 만큼 새롭게 깨달은 점도 많을 것 같다. =물론이다. 언제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번 작품은 특히 젊은 사람들과의 협업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경험자들과 일하면 그들은 언제나 ‘척 하면 딱’이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은 능력은 좋은데 영화 작업을 해본 사람들이 아니라서 의사전달에 힘든 부분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매 순간 떠올리면서 그들과 소통하려 노력했고, 결국은 해냈다.
-픽사의 젊은 아티스트들은 어떤가. =우리보다 훨씬 더 그림을 잘 그린다. (웃음) 우리 세대와 만화에 대한 접근방식이 다르고, 아이디어가 풍부하다. 픽사의 철학이 “당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고용해야 하며, 그 사람이 당신보다 낫다는 사실에 위협을 느껴서는 안 된다”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젊은이들을 발견할 때마다 뿌듯하다.
-다른 스튜디오와 차별화되는 픽사만의 장점은 무엇인가. =사람을 대하는 부분이 다르다. 디즈니를 포함한 할리우드 대부분의 스튜디오들은 사람들을 계약직으로 고용해서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는 계약이 끝나면 팀을 해체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런데 픽사는 거의 유일하게 종신고용을 보장하는 패밀리 스튜디오다. 아이디어를 내고, 치열하게 만든 작품이 성공한다면 누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하겠는가. 직원을 오랫동안 고용하면 그를 동시에 진행되는 여러 작품에 투입할 수도 있고, 다양한 부서에 보내 경험을 쌓도록 할 수도 있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애니메이션은 비슷하거나 진부할 수 없다. 장기고용은 픽사가 기발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픽사를 꿈꾸는 한국의 애니메이터들을 위해 픽사의 일과를 알려달라. =우리의 삶은 애니메이션 제작이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에 따라 상당히 다른데…. (웃음) 평균적으로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는 4년을 주기로 얘기하자면, 첫해엔 앉아서 사람을 뽑고 연구도 하고 예산 스케줄도 짜고 이것저것 그려본다. 우리는 스크립트 없이 일을 하기 때문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하는, 4년 중 가장 재미있는 해다. 2년차엔 팀을 구성하고 스케줄을 짠다. 3년차엔 밤낮없이 일을 하고, 4년차엔 기술팀과 예술적인 부분에서 협동작업을 하다보면 어느새 작품이 완성되어 있다. 매우 치열하게 살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면… 너무 허무하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