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집 청소를 했다. 방을 쓸고 닦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책 정리도 했다. 평생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은 모두 박스에 넣었다. 평생 한번은 들춰볼 것 같은 책은 책장에 그대로 뒀다. 평생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은 책상 옆에 차곡차곡 쌓았다. 3단계 분류에 따라 A급 판정을 받은 책이라도 다시 계체량 심사를 거쳐야 했다. 1주에 1권씩 먹어치운다고 해도 1년에 읽어낼 수 있는 책은 50권 정도에 불과하다. 추리고 추려 50위 안에 들지 못한 책들은 다시 B급 책들 사이로 밀어넣었다. 6개월이 지났다. 몇권이나 읽었냐고. 가만 보니 들춰본 책은 꽤 되는 것 같은데 완독한 책은 역시 1권도 없다. A급이든, B급이든, C급이든 똑같은 처지다. 선풍기를 온풍기로 만드는 무더운 여름, 먼지만 꾸역꾸역 먹고 있다. 그래도 2008년 상반기 독서지수가 빵점은 아니다. 가진 책 읽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새 책을 사 모았는데, 그중 읽어도 읽어도 밑줄 쫙 긋고 싶은 탐나는 물건이 있었다. 달랑 2권, 초라한 독서 좌판이지만 여럿이 나누고 싶은 마음에 공개한다.
<촌놈들의 제국주의>ㅣ우석훈ㅣ개마고원 사실 우석훈을 잘 몰랐다. ‘88만원 세대’도 언론이 만들어낸 신조어라고 여겼다. 그러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먼저 만났다. 이제는 필독서가 된 <88만원 세대>만 사기 뭣해서 같이 구입했다. 1학기가 다 끝나가는데 뒤늦게 교과서만 사기 뭣하니 무리해서 신간 참고서까지 하나 더 추가한 학생의 꼴이랄까. 가장 흥미로운 지적은 “한국 경제의 제국주의적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노무현 정권에 대한 규정이었다. 노(蘆) 정권이 이라크 파병과 FTA 체결을 강행하며 노(NO) 정권으로 냅다 뛰기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노란책을 꼭 펴보라. 식민지 없는 촌놈들의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면 어떤 비극적인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지, 왜 교육과 환경이라는 축을 바탕으로 평화경제학을 생성해야 하는지 절감할 것이다(식민지를 확보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여타 다른 산업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한국영화, 더 나아가 한국 문화산업의 글로벌 전략 또한 이 책의 비판에 따라 수정될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은 건 MB 정권의 수뇌들인데 여러 환란 수습하느라 한가로이 독서할 시간은 없을 테니, 10대를 위한 제언이라는 책의 취지에 걸맞게 그들의 자제들에게 한권씩 선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씨알이나 먹힐까 싶지만서도.
<노름마치>ㅣ진옥섭ㅣ생각의 나무 지인 중에 무용가들과 오랜 교분을 갖고 있는 분이 있다. <노름마치>는 그분을 통해서 우연히 소개받은 책이다. 사실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만 해도 여기저기 매체들에서 호평받았다는 소개글들이 먼저 눈에 밟혀 진귀한 보물을 찾은 듯한 환호나 기대감은 애당초 없었다. 잊혀진 예인들의 춤사위를 뒤늦게 무대에 올리면서 저자가 썼던 보도자료들을 한데 묶어냈다는 서문을 보고서 ‘애걔, 이게 뭐야’ 했는데, 본론으로 들어가 침 묻힌 순간부터 빠져드니 허우적, 허우적. 아껴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사실 이 책은 아직 반밖에 못 읽었다). 후대에 옛 사람, 옛 풍경을 맛나게 옮겨내는 일이란 쉽지 않은데, 저자는 전라도, 경상도를 넘나드는 사투리와 전통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무엇보다 독특한 문체로 독자의 감각을 송두리째 휘감는다. “벚꽃이 튀밥처럼 일순간 터져 그늘마저 눈부신” 손자의 소풍날, 옛 가락이 뽀글거리며 올라서는 통에 기어이 마이크를 잡았고, 그 일로 과거 전력이 드러나 아들 내외의 타박을 받은 끝에 결국 음독자살을 했던 늙은 예기(藝妓)의 비극을 시작으로 지은이는 도랑에 지독한 세월을 흘려보냈던 ‘노름마치’(고수)들의 마르지 않는 눈물을 절묘한 장단과 기막힌 추임새로 되새김질한다. 신파에 한잔, 두잔 취해 한꺼번에 울음을 토하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ps. 뒤늦게 보니 두권 모두 ‘망각’에 대한 경고이자, 한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