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의 조감독으로 있던 오우삼은 드디어 1973년 <철한유정>으로 데뷔한다. 27살이라는 제법 젊은 나이에 메가폰을 잡고 원규가 무술감독을 맡은 이 영화는 친구의 재정적 지원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청일전쟁 시기 무기밀매를 일삼던 갱들의 다툼을 그리면서 지나친 폭력묘사를 이유로 제때 개봉을 못하게 된 쿵후영화였다. 이때 골든하베스트가 오우삼을 스카우트하면서 이 영화를 같이 사들여 재편집하고 수정작업을 거쳤지만 오우삼의 의도가 잘 반영되지 않아 결국 오래도록 창고에서 썩어야 했다. 이때부터 그는 주로 회사가 요구하는 기획영화들에 매진하게 되는데, 당대의 코미디 스타였던 허관영과 함께한 <발전한>(1977)이 만족스런 성공을 거뒀고, 그 감각을 인정받은 그는 다시 허관영을 기용해 복권에 당첨된 한 시한부 인생 남자의 엉뚱한 이야기를 그린 <전작괴>(1979)로 다시 한번 성공을 거두며 코미디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의 코미디영화가 사실 잘 연상되지 않지만 그가 쉬어가는 기분으로 만든 <종횡사해>(1991)를 연출하면서 “그때의 기분을 되살리고 싶었다”고 말한 적 있다. 그리고 이때도 그는 직접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고집했다.
드디어 1981년 나중에 <영웅본색>을 제작하게 되는 영화사 시네마시티(신예성)가 설립되자마자 자리를 옮긴다. 여기서도 그는 일단 <골계시대>(1981), <마등천사>(1982), <소장>(1984) 같은 코미디영화들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에 따르면 ‘남자들의 우정 등 좀더 자신의 주제가 살아 있고, 액션의 요소들을 많이 담으려 노력’했던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골든하베스트에서 시네마시티로 옮기는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계약상 골든하베스트와 한편을 더 만들어야 했는데 드디어 액션영화를 만들려고 결심했다. 1983년 타이 로케이션으로 <황혼전사>라는 첫 번째 건파이트 영화를 만든 것. 하지만 골든하베스트는 염세적인 결말에 난색을 표했고 오우삼 또한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또 한번 <철한유정> 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영화는 타이 정부가 용병을 사서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접경에 있는 세계 최대 마약생산지인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약단 우두머리를 체포하려 하는 액션영화였다. 용병들 대부분이 정말 가진 것 없고 잃을 것 없는, 미국 영주권을 얻거나 생계를 위해 작전에 뛰어든 각지의 화교들이라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을 끝내고 미국으로 떠나려는 주인공은 최근 두기봉과 엽위신의 영화들에 보스 역할로 간혹 모습을 비추는 고웅(사진)이었고, 그를 쫓는 군대 소대장은 이후 ‘강시영화’ 장르의 영환도사로 유명한 고 임정영이었다.
오우삼이 코미디영화를 접고 <황혼전사>에 손댄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유학파’로 분류되던 서극이 <접변>(1979), 허안화가 <풍겁>(1979), 담가명이 <명검>(1980)을 만들면서 뉴웨이브라는 이름의 기운이 꿈틀댔지만 ‘토종’인 그로서는 기획영화에만 머물러 있다는 얼마간의 자괴감이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전의 기억까지 끌어들인 ‘과잉’의 영화 <황혼전사>는 결국 창고에 처박히게 됐고, 이후 오우삼이 시네마시티에서 <영웅본색>(1986)으로 대히트를 기록하자, 골든하베스트는 약삭빠르게 ‘영웅’이라는 이름에 편승해 <영웅무루>라는 제목으로 오우삼의 또 다른 누아르영화인 양 극장에 내걸었다. <영웅무루>는 그의 평생의 스승인 장철의 동명 영화로부터 온 제목이기도 했으니 그는 얼마나 착잡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