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조선운동 몇년이 하지 못한 일을 촛불은 단 며칠 만에 이루어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산 쇠고기에 섞여 들어온 뼈 조각 하나에도 호들갑을 떨던 조중동. 갑자기 논조를 180도로 바꾸어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떠들어대다가 본색을 들켜버렸다. 촛불집회의 배후에 선동세력이 있다는 보도에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애먼 사람도 졸지에 빨갱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촛불집회가 보수언론의 본색과 행태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귀한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대중이 갑자기 등을 돌리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조중동의 지면은 온통 촛불에 대한 원한으로 넘쳐흐른다. 그중의 어떤 기사는 마치 한여름 텔레비전의 납량특집을 보는 듯하다. 특히 공영방송을 겨냥한 <조선일보>의 사설에서는 어떤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KBS, MBC가 전경 어머니들 마음을 매일 밤 인두로 지져댄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기껏 조선시대의 고문방법을 끄집어내는 이 몰취향한 수사학은 그들이 이 정국에서 얼마나 불안감을 느끼는지 보여줄 뿐이다.
<중앙일보>에서는 사진 연출까지 했다. 식당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구워먹는 시민은 <중앙일보>의 기자들로 드러났다. <PD 수첩>에는 검사 다섯명. 그럼 이 뻔뻔한 조작에는 검사가 몇명이나 붙어야 할까? 해명에 따르면, 식당에 다른 손님들도 있었으나 촬영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랬단다. 하지만 손님 중에 촬영에 응할 사람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뭔가 말해주는 게 아닐까? 기사를 쓰는 대신 콘티를 짜는 이 해프닝에서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되도록 빨리 기정사실화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조급함을 본다.
압권은 어느 <조선일보> 꼬마 기자의 기사다. 어느 인터넷 카페에 ‘집안의 쥐XX를 잡고 싶다’는 농담 글이 올라오자, 그것을 ‘이명박 대통령 암살 기도’로 규정했다. 이 기사는 충분히 나의 흥미를 끌었다. 촛불집회를 테러리즘으로 낙인 찍으려는 데서 확인되는 거시정치적 의지. 그리고 이런 막장 크리를 통해서라도 사내에서 인정받으려는 젊은 기자의 푸르른 미시정치적 야망.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합쳐져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 꼬붕 기자의 과도한 해석학적 진지함을 낳은 것이리라.
네티즌은 즉각 ‘쥐XX=이명박’이라는 공식을 제공해준 <조선일보> 조백건 기자의 해석학적 친절함에 감사를 표했다. 이 해프닝은 이렇게 폭소로 끝났어야 한다. 황당한 것은 그 다음. 그 농담 글을 올린 네티즌에게 경찰에서 수사를 나왔다고 한다. 하니 청와대에서 수사를 지시했다나? 이렇게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청와대라면, 앞으로 쥐약 파는 동네 약국을 모두 압수수색할지도 모르겠다. ‘쥐를 잡자’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시민들은 암호로 암살지령을 내린 게 되나?
시청광장에 다시 수십만의 시민이 모였던 지난 7월5일. 광화문에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은 수십대의 경찰차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민과 독자로부터 버림받고 검찰과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언론사의 몰골. 경찰 버스의 바리케이드 뒤로 숨은 보수언론의 사옥은 내게 깊은 시각적 인상을 주었다.
어느 여당 인사가 ‘보수언론이 사회에 기여한 것은 없느냐?’고 했던가? 세상의 미물도 다 존재이유가 있을 터, 보수언론이라고 사회에 기여한 게 왜 없겠는가.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도 촛불집회 중에 동아일보 사옥에 달린 화장실을 두 차례, 조선일보가 있는 코리아나 호텔의 화장실을 한 차례 사용한 바 있다. ‘사회의 공기’(公器)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최소한 이렇게 사회의 변기(便器)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지의 지퍼를 올리며, 나는 드디어 보수언론에 제 몫을 찾아주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