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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죄의식을 날려버리는 명랑한 상상력

타란티노에 비해 천진난만한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

<롤링스톤>의 평론가 피터 트래버스는 <플래닛 테러>의 ‘쓰레기’ 같은 자질을 나열한 뒤, 이렇게 정리한다. “어떻게 그것에 저항할 것인가? 내 충고는,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피와 고름의 분출, 사지절단 행위와 훼손된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 집단 살육과 같은 이 영화의 선정적 요소들을 나름대로 옹호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를 다시 꺼내 들며, 고색창연하게도 폴린 케일의 말을 인용한다. “극소수의 영화만 위대한 예술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위대한 쓰레기(great trash)를 감상하지 못한다면 영화라는 것에 흥미를 가질 이유란 별로 없는 것이다.” <빌리지 보이스>의 네이선 리도 비슷한 기조의 평을 썼고, <LA타임스>의 평은 재미있게도 폴린 케일의 같은 에세이의 다른 말(“우리는 극장의 어둠 안에 홀로 앉아 있을 때, 모든 책임감, 그리고 선한 의지로부터 비로소 해방된다”)을 인용한다.

이상한 호들갑이다. 왜 이런 방식의 방어가 새삼스레 필요해졌을까. 폴린 케일의 ‘예술’과 ‘쓰레기’의 이분법은 이미 낡은 것이며 그 발상 자체가 지닌 엘리트주의의 한계 때문에(그 ‘쓰레기’의 위대성과 이른바 ‘예술영화’의 예술성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가장 늦게 잡아도 <펄프 픽션>(1994) 이후로는 거의 쓸모가 없어졌다. 게다가 미국 선정성 영화(exploitation movie)의 전성기인 1970년대에 쏟아져 나온 사지절단 호러들에 비하면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 그리고 동시상영 목적으로 함께 제작된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는 심지어 건전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표현의 수위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러하다.

이런 식의 방어들은 오히려 그 글을 쓴 사람들이 스스로 사로잡혀 있는 좋은 취향에 대한 강박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이건 예술은 아니야. 나쁜 취향에 호소하고 있어. 하지만 굉장히 강렬하고 매혹적이야’라고 자기 자신을 향해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로드리게즈와 타란티노는 1970년대 싸구려 심야극장(그라인드하우스)의 이른바 쓰레기 영화들의 달콤한 악취미를 되살리기 위해 이 동시상영(double features) 프로젝트를 실현했다. 텍스트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스크래치와 변색과 인화성과 결권(missing reel)이라는 셀룰로이드/아날로그의 물질적 결함까지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조작하면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두 영화는 70년대 쓰레기들의 향수 어린 자족적인 혼성모방에 그치지 않는다. 그 쓰레기들을 21세기에 다시 불러오면서, 두 감독은 동시대 관객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 잊기는커녕 새로운 관객과의 또 다른 게임을 매설한다. 타란티노가 <데쓰 프루프>에 내장한 게임은 이름 붙이자면 ‘길티 플레저’ 게임이다. 그 게임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말했지만(<씨네21> 620호>) 그 게임이 매우 영리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길티 플레저’라는 용어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말 그대로 죄의식을 동반한 쾌락을 뜻하는 이 표현에 대해 로빈 우드는 그 자체가 잘못된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즐거울 때 죄의식을 느낀다면 틀림없이 두 감정 중의 하나와 관계를 끊으려 하기” 때문이며, 그 죄의식이라는 것은 “부르주아 엘리트주의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부르주아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라는 인지가 그 죄의식을 추방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억압될 뿐 삭제되진 않는다. 게다가 신체 절단이 불러일으키는 쾌감에 달라붙은 죄의식마저 부르주아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플래닛 테러>에 대한 앞선 평들이 드러내듯, 그 감정의 상태는 매우 보편적이고 끈질긴 것이다. 하지만 로빈 우드의 말대로 그 양가적 감정은 두 감정 중 하나와 관계를 끊으려 하며 동시에 그 시도가 계속 실패하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길티 플레저라는 명명 자체가 그 불안정성을 안정된 기표로 고정화하려는 안간힘이다). <데쓰 프루프>가 게임을 벌이려는 상대는 바로 이 불안정성이다. <데쓰 프루프>의 전반부는 그것만 떼어놓고 보면 지극히 반동적이다. 네 여인들의 신체가 스턴트맨 마이크의 차로 인해 갈가리 찢겨나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들이 여자라는 사실, 그것도 관능적인 여자라는 사실뿐이다(그들은 <13일의 금요일>류의 10대 살인영화에서처럼 성적 방종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한 여인이 살아남아 남자에게 복수했다면 속이 뻔한 봉합이 되었을 것이지만 타란티노는 물론 그런 멍청이가 아니다. 어쨌거나 ‘길티 플레저’는 이 전반부에 관한 설명으로는 적합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후반부에서 전반부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다른 네 여인이 마이크를 시원하게 응징한다. 이것은 전반부를 본 관객의 ‘죄의식+쾌감’에서 죄의식의 항목을 해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응징은, 오직 후반부의 네 여자에게 가해진 위협에 대한 응징이다. 후반부는 전반부의 봉합이 아니라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다. 전반부에서 남겨진 죄의식은 정박할 곳을 잃는다. 봉합을 통한 억압조차 경유하지 못해 난처해진 이 죄의식이야말로, 타란티노가 이 게임을 걸어온 이유다. 타란티노는 그라인드하우스의 동시상영을 패러디하듯 두 이야기를 한 영화 안에 배치하고, 그를 보는 관객의 죄의식을 조롱한다. 이 게임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 좋을 수 없는 게임이다.

킬티 플레저의 죄의식을 훌쩍 벗어버린 로드리게즈

로드리게즈는 순박하다. 그가 벌이는 게임은 타란티노보다 훨씬 단순하다. 길티 플레저의 죄의식을 직접 무화하려는 것이다. <플래닛 테러>의 종양 덩어리 좀비는 무기상이자 과학자인 애비가 만든 생화학무기 DC-2의 직접적인 결과다(그 증세는 종양 확산인데 이것이 식인과 어떻게 연관되는 것인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미군은 아프간 침공 때 그것을 사용했고, 그것에 감염된 미군 부대의 부대장은 치료제를 찾기 위해 미국에 이 바이러스 무기를 살포한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바이러스 항체를 발견하려는 것이다. 이 명백한 전쟁 원인론은 전쟁 비판이라는 진지하고 뻔한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피해자로서의 정상인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좀비가 전쟁의 광기를 은유하는 것으로 고정되는 순간 그것의 제거는 윤리적으로 정당해진다. 부분적으로는 좀비가 총에 맞거나 헬리콥터 날개에 몸이 갈려나갈 때, 그 음향과 파열의 형상이 인간의 육체보다는 물풍선에 가깝게 느껴진다는 점에서도 이 제거 행위가 그다지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가해자 역시 바이러스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가해자로서의 좀비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행위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선 또 다른 설정이 필요해진다. <플래닛 테러>에선 좀비/괴물에 포위된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의심과 내분, 상호 살육이 일어나지 않는다. 잠정적 피해자 군상의 내파 위험(이것은 호러영화의 관습 가운데 하나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 좀비영화의 단순성을 방증한다. 그들은 바이러스에 저항하는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들이며, 중심 인물들 중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이상심리의 마초인 의사뿐이다. 그의 아들이 희생당하는 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비극이다. 바이러스와 감염이라는 모티브를 택했으면서도, 정상성과 괴물의 경계가 이처럼 명백한 호러도 드물 것이다. 괴물은 ‘우리’(포위된 사람들)를 위협하지만 괴물 바이러스가 ‘우리’의 내부로 스며들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종주의적 함의보다는 이 영화의 낙천성과 순진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결말에 이르면 건강한 유전자를 지닌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다.

<플래닛 테러>가 호러보다 서부극에 가깝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무의식과 연관된 길티 플레저가 아니라 소박한 영웅담의 쾌감에 호소하는 것이다. 중심 인물 엘 레이는 끝까지 정체불명이다. 결권에서 엘 레이는 보안관에게 자신의 정체를 말한 것으로 다음 시퀀스에서 확인되지만, 무엇을 말했는지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명사수이며(“내 총은 절대 빗나가지 않아”) 셰인처럼 홀연히 나타나 선한 ‘우리’를 구하고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 무엇보다 이곳은 텍사스이고, 그는 동지들을, <수색자>의 링고 키드가 떠나갔던, 멕시코로 인도한다.

<플래닛 테러>는 죄의식을 갖가지 방식으로 털어내고 거침없는 쾌활함과 낙천성을 좀비 호러의 세팅에서 구현함으로써 거의 마취적인 재미를 만들어낸다. 그 방식의 정점은 로드리게즈가 여주인공 체리 달링의 육체를 다루는 방식이다. <데쓰 프루프>의 전반부 끝에서 여성의 신체는 조각나고, 화면은 네번 리플레이되면서 조각난 신체들이 추락하는 장면을 각기 다른 각도로 느리게 보여준다. <플래닛 테러>의 첫 장면에서 체리 달링이 클럽에서 봉 춤을 추며 그 미끈한 다리와 굴곡진 엉덩이를 스크린에 가득 채울 때, 우리는 그녀의 신체가 조각나기를 불안하게 예감하고 은밀히 기대한다. 과연, 그녀의 다리 하나를 두 좀비가 절단해간다. 그런데 로드리게즈의 카메라는 타란티노와는 달리 조각난 신체에 탐닉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남은 육체, 그러니까 한쪽 다리를 잃은 그녀의 결여된 신체에 주목한다.

엘 레이가 별안간 사라진 다리의 자리에 책상 다리를 꽂을 때, 그리고 체리 달링이 그 다리로 씩씩하게 걸을 때 승부는 결정된다. 여기서부터 <플래닛 테러>는 거의 만화처럼 바뀌지만, 이전의 어떤 호러에서도 절단이 아니라 재통합을 향한 이 터무니없을 만큼 명랑한 상상력을 본 기억이 없다. 체리 달링의 나무 다리는 의미심장하게도 자신을 강간하려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눈을 찌르고, 곧이어 자동소총으로 대체된다. <플래닛 테러>가 사랑스럽다면 이 상상을 초월하는 명랑함 때문이다. 물론 치기 어린 유토피아주의에 인도된다 해도, 그것이 로드리게즈가 죄의식을 뛰어넘는 천진난만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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