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이 시대를 앞서갔다’는 말은 틀렸다. 고깟 얄팍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나약해빠진 후대의 영화와 그의 영화를 비교할 수는 없다. 무릇 천재의 창조물은 시대를 초월해 시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법이며, 이에 더해 진정한 천재에겐 시대를 꿰뚫어보는 눈이 있다. 김기영의 영화는 바로 ‘그가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라는 걸 염두에 두지 않을 경우, ‘김기영의 영화는 그로테스크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부르주아의 삶에 경도된 꼴같잖은 여자,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한 무책임한 남자, 문명의 이기에 얽매인 인간부터 동서로 나뉘어 총부리를 겨누는 세상, 공해의 폭발로 파괴되는 자연에 이르기까지 김기영은 현실의 얼굴을 우리쪽으로 돌려 보여줬으나, 우리는 그 괴물 같은 얼굴이 자신의 것임을 몰랐다. 이것은 참으로 애석하고도 이상한 일이다. 김기영은 한번도 에둘러 말하거나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대부분의 영화에 등장하는 불구의 인물은 벌레처럼 꿈틀대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이고, 알록달록한 유리 장식물들은 쉽게 파괴되는 병약한 현대사회를 반영하며, 배우들은 내레이션으로 처리해도 쑥스러울 표현과 속마음을 대사로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중 <고려장>에서 어머니가 다시는 보지 못할 절름발이 아들에게 내뱉는 어이없는 한마디- “너는 단 한번만이라도 똑바로 걸어볼 수 없냐”- 는 김기영이 우리에게 던지는 매서운 충고 자체다. ‘삶의 의지’는 김기영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다. 삶의 에너지를 불어넣겠다는 그의 입장은 전혀 사실적이지 않은 영화에서도 확고한 것이어서, 주인공이 삶의 의지나 인간다움을 잃을 때면 가차없이 죽음을 선고했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에서 죽음이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감독이 품은 살의의 결과일 뿐이며, 그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불안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관객의 심리에서 기인한다. 비관적인 삶의 양식과 허위에 빠진 도덕을 공격하는 김기영의 영화는 우울하고 어둡지만 결코 염세적이지 않다는 걸 우린 기억해야 한다. 김기영은 전무후무한 스타일로 세상의 진실을 그렸다는 점에서 루이스 브뉘엘과 비교되고, 산다는 것의 소중함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을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와 닮았는데, 부언하자면 김기영은 브뉘엘보다 솔직하고 구로사와보다 창의적이다. <김기영 컬렉션>은 회고전과 책자 발간 등으로 김기영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 바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이 각고의 노력 끝에 내놓은 또 하나의 성과다. 전근대와 근대, 자유와 억압, 욕망과 폭력이 피터지게 대결한 자리에서 썩어 문드러진 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고려장> <충녀> <육체의 약속> <이어도>는 김기영의 세계를 만끽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정수들이라 하겠다. 영화마다 쟁쟁한 영화평론가, 감독들이 음성해설을 맡아 감독의 위상을 실감하게 되는데 김대승, 김영진, 봉준호, 오승욱, 이연호, 정성일의 목소리는 때론 진지하거나 예리하고, 때론 경쾌하거나 화끈해서 흡사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나머지 부록도 묵직하다. ‘감독들, 김기영을 말하다’(김홍준, 48분)에는 22명의 감독들이 나와 김기영의 동시대적 의미를 되살리고 있으며, 인터뷰 ‘김기영이 김기영을 말하다’(35분)와 ‘감독 다큐멘터리’(51분)는 거인의 영화 밖 모습을 확인할 기회를 제공한다. 외국인을 겨냥한 듯 모든 부록에 한글, 영어자막이 지원되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