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집위원회의 밀린 글들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 “칸 기사를 읽으면서 기자들이 (중략) 영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야유를 퍼붓는 모습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대답은 하나다. 칸영화제는 다소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에 대한 (종종 가식적인) 예의’로부터 자유로운 장소다. 영화가 좋으면 기립박수가 터져나오고, 싫으면 야유가 터져나오고, 가끔은 기립박수와 야유가 동시에 터지고, 때로는 기자들의 욕설 다짐으로 번진다. 불쾌하긴커녕 너무 재밌어서 동영상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고 싶을 지경이다.
칸영화제에서는 매년 한편의 ‘집단적 야유작’이 잉태한다. 최근 경우를 예로 들자면 2002년 가스파 노예의 <돌이킬 수 없는>, 2003년 빈센트 갈로의 <브라운 버니>, 2006년 리처드 켈리의 <사우스랜드 테일>이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돌이킬 수 없는>은 생각만큼 나쁜 영화는 아니다. <브라운 버니>는 다시 볼 필요가 있는 수작이며 <사우스랜드 테일>은 흥미진진한 실패작이다. 사실 경쟁부문에 그보다 덜떨어진 영화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올해 경쟁작인 빔 벤더스의 <팔레르모 슈팅>에 대해서라면 나 역시 광적인 집단 야유에 동의한다.
벤더스의 새로운 로드무비는 한마디로 비극적이다. 독일 펑크록 스타 캄피노가 초창기 키아누 리브스처럼 연기하는 사진작가 핀은 밀라 요보비치의 패션지 촬영을 하다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가에 상처를 받고는 회의에 빠진다. 그래서 자가용 비행기로 이탈리아 팔레르모에 가서 진실되고 지루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는 이탈리아 여자와 사랑에 빠진 뒤 데니스 호퍼가 연기하는 ‘죽음의 신’에게 맞서 싸운 다음 인생의 의미를 되찾는다. <여고생 시집가기> 이후 이렇게 흥미진진한 영화는 처음이었다. 기자들은 히스테리컬한 폭소를 절망적으로 터뜨렸다. “안토니오니와 베리만에게 바친다”는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자 야유와 욕설로 난리가 났다. 이걸 선수입했을 한국 영화사에 애도를 보내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진짜 문제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오마주를 위한 오마주’에 있었다. 벤더스는 그냥 안토니오니와 베리만에게 바치는 영화를 하나 만들고 싶었을 따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마주가 주요 목적인 영화들은 기괴할 정도로 백치처럼 순진해질 때가 종종 있는 법이다.
좀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팔레르모 슈팅>은 올해 경쟁작의 기묘한 경향을 대변하는 작품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올해 칸영화제 영화들은 좋든 나쁘든 다 뭔가에 바치는 오마주처럼 보였다. 필립 가렐의 영화는 누벨바그에 대한 오마주, 파울로 소렌티노의 영화는 타란티노 오마주,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 오마주, 김지운의 영화는 (당연하게도) 마카로니 웨스턴 오마주. 누리 빌게 세일란의 영화는 자기 영화에 대한 (나쁜) 오마주 등등등. 이러다보니 새로운 영화를 보겠다는 열망은 영화제 중간 즈음에 슬그머니 사라졌다(다행히 캉테의 <교실>이 마음을 위안하긴 했다). 게다가 많은 감독들이 인터뷰에서 ‘누벨바그’ 같은 단어를 줄줄 입으로 토해냈다. 문제는 그들이 이루려는 최종목표는 고다르와 안토니오니 같은 영감들이 반세기 전에 훌륭하게 성취했다는 거 아니겠는가.
패션계에 또 다른 샤넬이, 음악계에 또 다른 스트라빈스키가 태어나지 않았듯이, 영화에도 새로운 고다르나 안토니오니는 아직 찾아오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영화적 자살로 희망을 버리기는 아직 이르지. 적어도 빔 벤더스만은 ‘팔레르모 자살’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기를 바란다. 이런 영화로 거장의 마지막을 기억한다는 건 생각만해도 우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