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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
이영진 사진 오계옥 2008-07-02

스튜디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멤버 인적사항

장형윤

스무살 언저리까지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 부를 축적하는 삶을 꿈꿨다. 수능점수 가라사대 경영학과 대신 정치외교학과를 택한 뒤 6개월 만에 그의 바람은 휴짓조각이 됐다. 토익 공부를 하다 갑자기 구토 증세를 경험했고 반미 감정까지 솟았다. 초일류기업에서 부속품처럼 살아가기에는 부적절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랑처럼 존재를 불태울 수 있는 작업이 뭘까 고민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과 글과 음악을 한데 버무릴 수 있는 애니메이션에 입문키로 마음먹는다. 그림 실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그는 ‘고수입 보장’ ‘미래유망직종’이라는 간판을 내건 노량진의 한 애니메이션 학원에 등록했으나 강사들이 입시를 코앞에 둔 고딩들에게만 관심을 쏟는 바람에 화실에서 나 홀로 벽돌만 그리다가 한달도 채우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이 무렵 애니메이션 회사에 무작정 찾아가 결의를 밝히기도 했지만 캠퍼스에서 젖 더 먹고 오라는 핀잔만 들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1999년 ‘미메시스 디지털 애니메이션 워크숍’을 듣지 않았으면 그의 방황은 더 오래 지속됐을지 모른다. 전승일 감독 아래서 기초를 다진 뒤 2002년 한국영화아카데미 18기로 턱걸이 입학했고, 안종혁 교수와 이성강 감독의 지도 아래 무공을 키운 그는 최우수 졸업생으로 뽑히기도 했다.

박지연

장형윤 감독의 <편지>에 등장하는 아미처럼 과거 그녀도 우체국 직원이었다. 소도시의 한가한 우체국이라 우편물 취급보다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일이 더 많았다고 한다. 원치 않았던 우체국 요양생활은 이내 따분해졌고, 취미였던 그림 그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 요량으로 사표를 던졌다. 이와 동시에 집에서 쫓겨나는 변을 당하기도 했다. 공무원 제일주의를 항상 강조하셨고, 사윗감도 공무원이어야 한다고 되뇌셨던 아버지와의 갈등을 뒤로하고 찾아간 곳이 동화작업을 주로 하는 애니메이션 회사. 한달에 30만원씩 받으며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동화, 채색 작업을 했다. 라디오 켜놓고 캐릭터에 색깔 입히는 회사 분위기가 흡사 70, 80년대 봉제공장과 다름없었다고. 제 그림 그리고 싶어 공무원 시절 모아둔 돈 싸짊어지고 서울행을 택했지만 결과는 질식과 혼절이 반복되는 애니메이션 공장에서의 노동자. 갑갑함이 오죽했을까. 선배의 도움으로 남들보다 빠르게 원화 작업 아래 단계인 레이아웃, 클린업 작업을 맡을 수 있었다지만 억눌린 욕구가 쉽사리 펴지진 않았다. 이후 동화회사에서 나와 ‘연필로 명상하기’에서 처음으로 창작의 쾌감을 맛봤고,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던 중에 “실력보다는 성실한” 스탭을 찾는 장형윤 감독에게 “나는 성실할뿐더러 실력도 좋다”는 자만에 찬 메일을 보낸 것을 계기로 <티타임> 때부터 함께 작업해왔다.

홍덕표

‘지금이 아니면 안 돼’(nowornever) 멤버 중 유일한 애니메이션 전공자. 계원조형예술대학 애니메이션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대부분의 과목은 ‘양 혹은 가’로 도배했으나 미술시간만큼은 우등생이었다고 전해진다. 고등학교 졸업 뒤에 곧바로 애니메이션 학과에 진학했던 건 아니다. 만화방을 전전하며 대본소 만화를 탐독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박모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때만 하더라도 대본소 만화가 꽤 인기있던 터라 벌이도 쏠쏠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지하 작업실에서 밥 먹을 때만 제외하고 그림만 그리는 일이 이내 싫증났고, 제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1997년 대학을 택했다. 입학 당시만 하더라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다르다는 걸 몰랐다. 또 다른 세계의 재미를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입학과 동시에 자퇴서를 내고 도망쳐나왔을 것이다. 졸업 뒤에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직했으나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곧바로 개인 작업에 몰두했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감독 시켜주겠다는 회사의 회유가 믿기지 않았을뿐더러 이러다간 고작해야 엔지니어밖에 안 되겠구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장형윤 감독과의 인연은 2004년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작에 함께 선정됐을 때부터 시작됐다. 같이 선정작에 올랐지만 심사평에 장형윤 감독의 <아빠가 필요해>만 언급되는 바람에 묘한 경쟁심을 갖게 됐고, 그 바람에 한동안 거리두기를 시도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일은 모르는 일. 장 감독의 장편애니메이션 작업이 진행된 뒤 프로듀서로 스카우트되어 스튜디오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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