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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오리는 어떻게 판다의 아버지가 되었는가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과 <쿵푸팬더>에서 보이는 반환의 의미

(스포일러 심합니다.)

극장가를 호령하고 있는 <인디애나 존스4-크리스탈 해골의 왕국>과 <쿵푸팬더>를 연이어 보았다. 두 편 모두 즐겼다. 이 영화들을 정색하고 따지듯 말하는 건 어색한 일일 것이다. 극소수 극장에서 최근 상영된 <그들 각자의 영화관>의 난니 모레티 편에는 이 골수 좌파 이탈리아 감독이 2007년 1월 <록키 발보아>를 보면서 16년만에 돌아온 록키가 공원 계단을 뛰어올라 손을 들고 소리치는 장면에서 자신도 함께 손을 들고 소리를 함성을 질렀다는 고백이 나온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많은 동세대 사람들은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에 대해 난니 모레티에게 <록키> 시리즈가 주었던 오랜 친구와 같은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다. 국적은 물론이고 정치적 올바름의 의식조차 가볍게 뛰어넘는 그런 느낌을 좀 더 젊은 관객이라면 <쿵푸 팬더>에게 가질지 모른다. 세대의식이라고 부를만한 특별한 친근감을 만들어내는 그 텍스트의 자질과 당대의 사회문화적 컨텍스트를 분석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여기선 다만 두 영화를 보고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나열하려 한다.

초국적이며 범인류적인 메시지, 반환

<인디애나 존스4>을 볼 때 눈길을 붙든 단어 하나는 ‘반환’(return)이었다. 인디애나의 동료 고고학자 옥슬리가 수감되어 있던 정신병동의 벽에는 수십 가지 언어로 ‘반환’이라는 단어가 씌어져 있다. 그 중엔 한글로 쓴 ‘반환’도 똑똑히 보인다.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수십 개국의 언어로 새겨져 있을 때, 반환의 의미는 초국적이며 범인류적 메시지가 된다. 그런데 ‘return’에는 ‘귀환’의 의미도 있다. 돌려준다는 것과 돌아온다는 것. <인디애나 존스4>에는 돌려주는 것과 돌아오는 것이 차례로 등장한다. 돌려준 다음에야 돌아오는 것이다.

돌려주어야 하는 것은 크리스탈 해골이다. 영화 초반에 그것은 이른바 로스웰 사건과 연관된 외계인의 해골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디애나 존스4>에는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트릭이 있다. 1편인 <레이더스>(1981)의 마지막 장면은 ‘잃어버린 성궤’가 거대한 (아마도 미군 부대의)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거의 창공의 높이에서 부감으로 인부들이 수많은 나무상자들 사이로 성궤가 든 나무상자를 들여놓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인디애나 존스4>의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창고는 <레이더스>의 창고와 흡사하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두 창고가 비슷하게 보이도록 설계했다. <레이더스>의 성궤 궤짝을 20년 뒤에 누군가 찾으러 온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추격자가 나치(<레이더스>)에서 소련(<인디애나 존스4>)으로 달라진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차이는 2차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1936년과 냉전기인 1957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의 차이에 조응하는 풍경의 차이다. 악당의 존재감은 오히려 이번이 약하다. 자신을 회유하려는 소련 스파이에게 인디애나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번역된 자막은 지나친 의역이다. 실제로는 “나는 (당시 미국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좋아”(I like Ike)라고 말하는데 뒤이은 시대 묘사를 보면 이건 오히려 운율의 유머인 것 같다. 옛 동료인 마크는 소련에게 빌붙은 이유를 “내가 (돈이 가장 중요한) 자본주의자이기 때문이지”라고 말한다. 스필버그가 그린 1957년의 미국 풍경에는 끔찍한 핵 무기 실험, ‘빨갱이 축출’이라는 피켓을 든 대학생 무리의 허깨비 같은 모습과 정치와 무관한 인디애나를 학교에서 내쫓는 매카시즘도 담겨 있다. 이런 묘사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인 쪽에 가깝다.

의미심장한 건 스필버그가 성궤와 외계인의 해골이 동일한 대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이 시리즈의 아귀를 맞추는 일이기는 하다. 이 시리즈에서 2편의 상카라 돌과 3편의 성배는 제자리에 되돌려졌다. 그러나 1편의 성궤는 되돌려지지 않고, 국가 기관의 창고에 깊이 감춰졌다. 이제 그것이 되돌려질 차례인 것이다. 그런데 그 반환의 대상을 굳이 (유대교의) 성궤에서 외계인의 해골로 대체할 때, 스필버그는 이 전적인 재담의 영화에서조차(그는 인디애나 4편이 <뮌헨>을 보고 우울한 관객을 위한 산뜻한 디저트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뮌헨>에서처럼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넘어서려 애쓰는 것 같다. 그 외계인의 해골이 자성이 없는 크리스탈임에도 총과 탄환과 칼, 그리고 황금을 끌어당길 때, 스필버그의 영화들에서 외계인이 메시아/친구의 모습으로 등장해온 순간들(<미지와의 조우><E. T>)을 상기할 수밖에 없다. 전쟁과 탐욕을 무화하는 초국가적이며 초종파적인 그러나 더욱 종교적인, 초월적 존재로서의 메시아/친구.

<인디애나 존스4>가 전편들과 가장 다른 점은 반환에의 의지 혹은 강박이다. 2, 3편에서도 보물은 결국 되돌려졌으나 탐욕스런 유물수집광인 인디애나를 움직인 사적 모티브는 획득의 욕망이었으며, 반환은 마지막 순간에 획득을 포기한 결과다. 하지만 그가 마침내 4편에서 “해골이 나에게 돌려주라고 했어”라고 말하며(그가 옥슬리의 정신병동에서 그 명령을 들었는지, 아니면 정말 해골로부터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을 한번도 탐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반환하려 할 때, <인디애나 존스4>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진지해진다. 쌈질 잘하고 영악하며 재빠르고 입심 좋고 넉살 좋은 도굴범이 수십 가지 언어로 전해진 인류의 명령을 뜻밖에도 서사의 전 과정에서 받아들였을 때, 이 재담은 어쩔 수 없이 얼마간 무거워지는 것이다.

4편이 여전한 기교와 볼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 중에서 가장 심심하게 느껴진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스필버그는 그 부담을 짊어지고서라도 <우주전쟁> 혹은 <뮌헨>에서 전하려 했던 근심을 이 재담에도 우회적으로나마 새겨 넣는 쪽을 택했다. 나는 이 재담의 여전한 활기 때문이라기보다(그것만이었다면 더 즐겼을 지 모르나 일종의 배신감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둔중함을 감수하려는 그 근심의 흔적 때문에 이 늙은 모험가의 이야기에 마음이 간다. 오랜 친구가 보내온 재담에 담긴 근심의 음조를 외면하는 건 그러니 온당치 않을 것이다.

반환의 명령을 완수했을 때 인디애나의 아내와 아들이 돌아왔다. 혹은 옥슬리는 제정신이 돌아왔다.(마지막에 해골을 들고 있던 사람은 옥슬리였다) 이것은 범상한 해피엔딩이다. 스필버그는 그 범상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언은 반환하는 자에게 최상의 힘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지만, 그 힘은 처음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 외엔 이룬 게 없다. 상카라 돌의 반환은 한 부족의 평화를 가져왔고, 성배의 반환은 악인의 소유를 막은 것이었지만, 크리스탈 해골은 본래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디애나는 이번에 정말 한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반환은 실은 오직 귀환일 뿐이다. 멀쩡해진 옥슬리가 현자처럼 말하길, “인생은 얼마나 많은 기다림으로 허비되는가”. 앎도 힘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나는 알고 싶다”며 버티던 소련 ‘공산당’ 장교와 황금에 눈먼 미국 ‘자본주의자’ 마크는 모두 신과 외계인이 일체가 된 ‘우주 사이의 우주’가 삼켜버렸다. <인디애나 존스4>는 미국식 영웅담의 외양이지만 아마도 동양적 허무주의에 가장 가까이 간 스필버그 영화일 것이다.

상상계로의 퇴행에 대한 향수

<쿵푸 팬더>의 설정은 <인디애나 존스>와 흡사하다. 다만 성궤/성배/해골의 자리에 용문서가 있다. 절대 무공의 비급이 담긴 용문서를 놓고 악당 타이렁과 하찮은 뚱보 포와의 한판 승부가 벌어진다. 온갖 동물들이 쿵푸 대결을 벌이는 이 혼성장르 애니메이션의 성분을 따지는 건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한심한 낙오자가 공동체의 영웅이자 지상 최강자가 된다는 극히 순진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포의 음성을 맡은 잭 블랙의 목소리 연기보다 여기서 더 훌륭한 건 없는 것 같다. 잭 블랙은 목소리만으로도, 그의 열렬한 팬인 김은형기자의 표현을 빌면, 하찮은 우리들의 지존이다.

용문서에 실은 아무 것도 씌어져 있지 않으며 그것을 보는 자신의 얼굴이 비칠 뿐이라는 사실에서 반환/귀환 대신 획득/귀환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협 장르에서 매우 낯익은 이 설정은 그것이 (자기에게로의) 귀환으로 끝맺는다는 점에선 <인디애나 존스4>와 비슷해 보이지만 <쿵푸 팬더>는 영웅의 완성과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실제적인 성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도상은 무협장르에서 빌어왔음에도 오히려 고전적 서부극에 가깝다. 무협장르의 영리한 미국식 번안인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보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데 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상한 점 하나 때문에 계속 긴장을 느꼈다. 그것은 팬더인 포의 아버지가 오리라는 사실이다. 오리의 아들이 팬더가 될 수 있다면 사마귀가 그 몸집 그대로(“어! 당신은 당신 인형과 크기가 똑같군요”라고 포는 말한다) 강호의 절정고수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쿵푸 팬더>는 종의 차이가 인간적 성향 혹은 소속집단의 차이의 비유로 받아들여지는 의인(擬人)동물 애니메이션의 발상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그렇다 해도 왜 굳이 팬더와 오리를 부자로 설정했을까. 그것은 비유로서의 차이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과도한 설정 아닐까.

따라서 이 영화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포가 아버지에게 “나는 아무래도 아버지 아들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할 때이다. 이 대사는 서사의 진행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이 말을 하는 시점은 용문서에 아무것도 씌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 낙담한 포가 집으로 돌아온 직후이다. 포의 낙담과 친자 여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말을 할 이유가 없는 자리에서 그 말이 내뱉어 질 때, 오리 아버지-팬더 아들이라는 과도한 설정의 위험함을 영화 스스로 노출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즉 그 말이 등장하는 순간은 즉 약속된 비유로서의 차이가 존재론적 차이로 인지되려는 순간,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것에 긍정적으로 답한다면 비유로서의 차이로 형성된 이 동물 공동체의 상징적 질서가 붕괴될 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한 순간이다. 이 때 오리 아버지의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너에게 말해줄 게 있는데…. 실은 국물의 비법은 없다는 거야”.

포의 난데 없는 질문과 무관한 이 뜬금 없는 대답은 ‘너는 틀림 없는 내 아들이다’라는 안심의 확인을 뛰어넘어 친부(오리 아버지)와 스승/공동체(거북이 대사부)의 법을 동일화한다. 용문서의 비급과 국물비법은 똑같이 없는 것이다. 없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문서가 사실상 거울이라는 점이다. 마치 정신분석학을 원용하려는 듯 <쿵푸 팬더>는 거울로서의 용문서에 비친 자기 모습이 바로 영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 질서를 위태롭게 만드는 지점까지 갔다가, 모든 차이를 일거에 무효화하고 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자아 이상형으로 되돌이켜 인지하는 상상계에로의 퇴행, 혹은 그 때의 충만함에 대한 향수. 그 곳은 스필버그가 한동안 머물렀으나 오래 전에 떠나온 영화적 장소이기도 하다. 팬더 아들과 오리 아버지의 이 이상한 문답보다 그 장소의 여전한 매혹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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