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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어차피 인생은 다 영화의 소재다”
정재혁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8-06-18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 개막작 <최고의 날들>의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감독

한 남자를 두고 평생을 불안해하는 두 여자.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 개막작 <최고의 날들>은 아슬아슬한 인간관계를 통해 주인공들의 마음을 땅 끝까지 살피는 영화다. 영화의 촉수는 매우 예민하고 주인공들의 심리는 복잡해 영화의 관심사가 질투인지, 동정인지 하나의 단어로 단정짓기 어렵다. 연출을 맡은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감독은 여자주인공 역할을 20대, 40대, 60대로 나누어 각각 다른 3명의 배우에게 맡겼으며, 이들의 장면을 시간을 무시하고 서로 교차시킨다. 그녀는 전작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실험해왔는데 <최고의 날들>에선 이를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어간다. 1970년대 러시아의 렌필름에서 수련하고,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의 <러시아 방주> 대사를 썼으며, 2007년 7번째 장편영화를 완성한 러시아의 여성감독. 로테르담영화제는 올해 그녀에게 회고전을 바쳤고, 서울국제영화제도 특별전을 마련했다.

-여자주인공을 3명의 배우가 나누어 연기한다. 시나리오에도 있는 설정이었나. =그렇다. 이야기, 영화의 내용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소재야 전화번호부에서 전화번호 찾듯이 고르면 된다. 그걸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중요한 거고. 여성의 삶 자체가 매우 복잡하고 독특하기 때문에 3명으로 나누어 연기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나이에 따라 먹고 마시는 게 다 다르기 때문이다.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음악에 대한 질문이 나왔지만 영화가 음악이라기보다는 끊임없는 사운드로 이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날들>에 쓰인 한곡은 알렉산더 소쿠로프가 만들어준 거다. 그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특성을 표현할 줄도 알고 동시에 자기만의 특징도 드러낸다. 그 점이 훌륭하다고 본다. 내 영화에선 음악, 사운드가 항상 큰 역할을 한다. 내러티브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영화에서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평생을 싸우는데 사실 그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다만 상황의 감정, 복잡함, 분위기가 중요하다.

-작품마다 감독의 특성이 뚜렷해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줄 알았다(프로슈리나 감독은 전편의 영화를 러시아의 유명한 시나리오작가와 함께 작업했다). =시나리오가 굉장히 많이 변하는 편이다. 대사도, 상황도 계속 바꾼다. 배우들이 특정 상황에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부분도 있고. 지금 준비 중인 영화도 한 남자를 세명의 여자가 기다리는 내용인데 여기서도 다수의 여자와 한명의 남자라는 관계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젊은 시절을 소비에트 정권에서 보냈고, 70년대에 렌필름에서 영화를 배웠음에도 당신 영화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압박이 거의 없다. =국가적인 힘이나 이데올로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가령 내 이웃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 날 죽이려 한다고 할 때 국가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소비에트 시절엔 모든 걸 다 관리하려 했지만 사실 그게 가능한 것도 아니고. 난 개인의 이야기에 더 끌린다.

-1992년 <거울 속의 투영>을 찍고 이후 10여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업을 했다. 그중 하나가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의 현장을 담은 <섬, 알렉산더 소쿠로프>다. =시대적인 변화의 영향이 크다. 당시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있었고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졌다. 다들 돈도 없고, 국가에서도 지원을 안 해주니 영화계를 떠났다. 그래서 나도 TV채널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든 거다. 아트영화를 선호하긴 하지만 다큐멘터리도 그중 일부라고 본다. 아트영화가 음식 전체라면 다큐멘터리는 차랄까. 어차피 인생은 다 영화의 소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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