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상하지 못한 중고생들의 촛불집회가 대중의 가두투쟁으로 번지는 상황. 경찰은 당혹스러운 모양이다. 운동권 집회라면 물대포를 쏘며 일거에 진압을 해버리겠지만, 아기를 안은 엄마,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아빠, 가슴까지 움푹 팬 옷을 입은 아가씨, 촛불을 든 중고생들 앞에서 경찰의 고전적 진압방식은 무색해진다. 시민들의 평화로운 일상과 진압무기로 무장한 경찰이 충돌할 경우, 시각적 콘트라스트가 너무 선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권보다 강적을 만났다.” 어느 경찰의 푸념은 현재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 격렬하다는 한총련도 자정이 지나면 시위를 풀고 해산을 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촛불시위는 자정을 훌쩍 넘겨 번번이 철야시위로 이어진다. 나도 시위란 시위는 다 해봤지만, 이렇게 집요한 시위는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다. 그것은 지휘부가 없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게다. 거기에 모이라고 지시한 사람이 없으니, 해산하라고 지시할 사람도 없는 셈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시위이기에 주동자도 없고, 그러다 보니 처벌하기도 여의치 않다. 도로교통법 위반? 경찰에서는 5월17일 휴교 괴담을 퍼뜨린 이를 촛불집회의 배후로 지목했으나, 찾아내고 보니 그 배후는 19살의 재수생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심어놓은 프락치를 통해 정보를 빼내어 시위대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면 지금 서울의 거리를 채운 물결은 바로 다음 순간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당혹스럽기는 정권의 반대편에 서 있는 정당이나 단체도 마찬가지. 그들 역시 처음 경험하는 현상 앞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형국. 그들은 느닷없이 폭발한 이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섣불리 이 시위를 ‘지도’하러 나섰다가는 괜히 대중의 자발성에 찬물만 끼얹을 것이라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으로 결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방관하기도 뭐한 어정쩡한 상태가 된 것이다.
과거에 집회가 열리면 주로 주최쪽에서 부른 인사들이 줄줄이 올라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설을 늘어놓곤 했으나, 지금 단상에 올라와 연설을 하는 것은 조직되지 않은 일반 시민이다. 과거의 집회는 그 형태가 간접민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것은 철저하게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대중을 선도적 전위에 이끌리는 동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에 익숙한 세대는 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거리의 대중이 미디어로 무장한 것도 새로운 현상이다. 그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휴대폰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행동을 결정한다. 들뢰즈가 말한 ‘리좀’과 비슷한 현상이다. 또 과거에는 지도부에서 시위 참가자들에게 상황을 알려주었다면, 지금은 대중이 인터넷 방송으로 직접 현장을 생중계한다. 그로써 현장에 직접 나올 수 없는 이들도 시위에 원격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가두시위가 시공의 한계를 넘어선 셈이다.
정부와 여당, 보수언론의 수구성은 이 시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의 설명은 여전히 과거의 공안적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다. ‘배후가 있다.’ 듣자 하니 경찰에서 인터넷 카페를 조사할 것이라 한다. 과거에 안기부나 중앙정보부도 민주화 시위의 배후에서 늘 간첩조직을 찾아내곤 했다. 누군가를 찾아 언론에 시위의 배후로 내세워야 상황이 종료될 거라 믿는 모양이다. 그 버릇이 과연 이번에도 통할지 의문이다.
문제는 배후가 없는데 배후가 있다고 말하는 데에 대한 억울함이 아니다. 촛불집회를 통해 드러난 새로운 문화적 코드를 읽지 못하는 정부여당과 보수언론의 돌머리다. 머리가 굳은 것은 본인들의 사적 불행일 터이나 저토록 굳은 머리를 가진 자들에게 이 나라의 운명을 5년이나 맡겨놓아야 한다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다. 지금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시민들이 대표하는 디지털 시대정신과 정부여당이 가진 7080 복고풍의 충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