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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125분의 1초
이혜정 2008-06-06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고등학교 1학년 소녀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사진반이란 곳에 가입했다. 처음으로 잡아본 PENTAX , 찰칵 하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와 함께 소녀의 인생이 바뀌는 소리가 들렸다. 수줍은 사춘기 소녀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도 모르고 그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만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도 모른 채…. 더이상 갈 곳 찾지 못해 헤매던 소녀는 그저 자기 자신에게로만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소녀에게 카메라는 기적이었다. 세상과 소녀를 소통시켜주는…. 세상을 향해 나 여기 있어요. 나 좀 봐주세요. 나는 이런 애예요란 말을 할 용기조차 갖지 못했기에 그저 책만 바라보고 집과 학교가 이세상의 전부인 양 지내던 소녀에게 카메라는 소통의 대상이자 용기를 불러일으켜주는 매체였다. 영화 <마스크>에서 짐 캐리가 마스크를 쓰자마자 갑자기 엄청난 파워와 용기를 갖듯이 카메라를 들고 카메라 뒤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소녀는 세상을 제대로 볼 용기를 갖게 되고 세상을 향해 소리칠 준비가 된다. 카메라가 없는 순간에는 그저 조용히 세상을 응시만 하던 소녀는 이제는 카메라라는 무기를 들고 세상을 향해 소리친다. 여기를 보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무서워서 한번도 말조차 못 걸어본 동네 어귀의 넝마주이 할아버지에게 웃으며 “할아버지, 제가 사진 좀 찍을게요”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카메라를 무작정 들이대며 찍어대던 소녀에게 소리치던 공사장 인부아저씨도 카메라 뒤에서 수줍게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에 이내 화를 누그러뜨리셨다. 참 희한한 일이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비로소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소녀는 사람이 없는 풍경은 찍어본 적이 없단다. 아무리 멋있는 풍광이 눈앞에 펼쳐져도 그곳에 사람이 없으면 사진을 찍고자 하는 욕구가 일질 않는단다.

그렇게 해서 소녀는 사진기자가 되었고 어느새 카메라를 든 지 25년의 세월이 흘렸다. 사진기자의 카메라 가방은 망원렌즈, 표준 줌렌즈, 광각 줌렌즈, 카메라 보디와 스크로보세트까지 10kg정도의 무게가 나간다. 그 무게를 어깨에 메고 목에 걸고 사진 찍기를 긴 세월 동안 반복하다보니 어깨와 목의 통증은 날로 깊어만 갔다. 그저 사진기자로서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려니 하면서 아플 때 물리치료와 파스로 견디고 있었지만 날로 심해지는 통증은 한계에 다다랐다. 드디어 며칠 전 보험의 혜택을 받지도 못하는 그 비싸다는 MRI를 찍고 목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앞으로 꽤 오랫동안 병원치료를 받아아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절대로 무거운 것 들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이렇게 디스크까지 걸려가며 사진을 왜 찍냐고 물으면? 그저 웃을 수밖에. 사실 내가 사진을 찍으면서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해봤자 일생을 통해 고작 몇초에 지나지 않는다. 촬영 도중 갑자기 세상이 정지하고 나와 대상만이 존재하며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며 아 이걸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교감’이라 말할까?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나와 대상이 교감하는 그 한순간. 카메라의 셔터 속도는 1초를 125으로 잘라 나눈 125분의 1초라는 그 짧고도 짧은 물리적인 시간과 관계없이 나의 감성의 시간대에서는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지던 그 순간이 나와 대상이 교감하는 그 순간이다.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의 그 사운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희열을 느꼈던 그 순간을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1년에 125번을 느낀다 해도 1초밖에 되지 않으니 25년의 세월로 보면 25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몇초 속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던져넣었던 걸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 125분의 1초를 한번만이라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카메라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