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먼 제국, 한밤중 땅이 세번 흔들렸고 서쪽 하늘에 큰 별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왕이 예언자에게 물었다. 예언자 천신 운밀이 고하길, 하늘의 운명을 지닌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는 왕후의 운명을 가졌으니 기다리면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온유하고 정의로운 율나라의 왕자 ‘기’, 명석하고 야망이 큰 휘나라의 왕자 ‘군’, 영리하나 질투가 많은 군의 후궁 ‘하’, 왕후를 흠모하는 휘나라의 청년귀족 ‘황현’, 왕후의 비밀무사 ‘일학’, 그리고 왕후의 운명으로 태어난 ‘공진향’. 이들을 둘러싼 권력과 사랑 이야기.
소설이나 영화 시놉시스냐고? 아니다. ‘후’라는 LG생활건강의 화장품 브랜드 광고다. 화장품 광고 하면 떠오르는 유형의 광고들과 매우 다르다. ‘후’의 광고 캠페인은 드라마 타이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꾸며 그 속에 ‘왕실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름다움의 비법’이라는 브랜드 컨셉과 개별 제품의 특징을 교묘하게 녹인다. 가상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브랜드다. 15초 광고 속에 이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기 때문에 광고는 마치 예고편처럼 이야기의 단초나 핵심만 전하고 못다한 이야기는 매월 발간하는 뷰티잡지에 ‘매거진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고 있다.
“어떤 남자가 있었다. 한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녀 아버지의 반대로 헤어져야 했고 그녀와는 담배 한 개비 피울 시간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그때 필터없는 담배가 빠르게 타들어가는 것이 안타까웠던 그는 담배 필터를 개발해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돌아와 청혼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떠났다. 남자는 메모를 남기고 자살했다. 자신의 회사 이름을 M.a.r.l.b.o.r.o로 해달라고. 말보로,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ccasion.”
이야기를 다 읽었으면 1시간쯤 뒤 친구를 만나서 이 이야기를 해보라. 아마 아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 이야기를 한 블로그에서 딱 한번 흘려 읽었는데, 거의 정확하게 써내려갈 수 있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이야기의 힘에 대해 누군가는 ‘딱 달라붙는 효과’(STICK)가 있다고,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이론이나 숫자를 이야기하면 머리 아프다고 고개를 돌리기 십상이지만, 이야기로 풀어 말하면 쉽고 재미있어진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은 잠자리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어린아이들에게 세상살이의 지혜를 알려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애플사의 매출 규모보다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와 대성공을 거둔 스티브 잡스의 인생 역전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애플사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흥미를 유발하고 또한 오래 기억시킬 수 있는 스토리텔링 기법은 최근 인터넷이라는 쌍방향의 매체로 인해 더 강화되고 있다. 아디다스는 ‘Impossible is nothing’ 캠페인을 스포츠 스타들의 숨은 이야기로 풀어놓았다. “내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베컴의 이 말에 조급증이 안 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근 집행된 TV 광고에서는 베컴과 한 소년(이 소년은 제라드의 팬이다)의 어색한 대화 끝에 “Adidas.com에서 상영 중”이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베컴과 소년, 그리고 제라드간에 뭔가 재미있는 사건이나 사연이 있을 것 같은 호기심에 사이트를 방문하게 된다. 아우디는 2006년 신차 A3 ARG의 런칭을 준비하면서 오토쇼에 나갈 차량이 뉴욕판 매점에서 도난당했다는 가상의 스토리를 만들어 관심을 집중시킨 뒤 소비자가 직접 참여해 스토리를 완성해가는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광고 제작의 기본은 ‘단순화’라고들 한다. 군더더기를 떼어내고 가장 핵심적인 알맹이만 전달하는 것. 하지만 흥미를 유발하고, 기억을 유지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살을 붙여나가는 ‘스토리화’도 분명 매력적인 광고 만들기다. 최근 광고들을 들여다보면 아디다스 같은 다큐 형식의 이야기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KTF가 다른 업종과의 제휴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딱딱한 이야기를 곰과 토끼의 사랑, 임신이라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포장한 애니멀 콩트도 인기를 모았다. 광고판에도 드라마 <온에어>의 서영은 작가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