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은 수류탄과 함성이 도처에 난무하는 시기였다. 이때, 다른 생각을 한 여자들이 있었다. 자신을 뒤쫓는 경찰을 보고 ‘우리 남편이 때리러 오는 모습이랑 똑같다’고 생각한 그녀들. 이제 이들은 가정 폭력의 상처를 ‘쉼터’라는 보호시설에서 치유하고 있다. 5월23일 개막하는 제3회 여성인권영화제의 개막작 <쉼터를 만나다>는 ‘쉼터’에 머무는 이들과 이곳을 거쳐간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를 만든 란희 감독은 여성인권운동단체 ‘서울여성의전화’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현실이 얼마나 치열한 투쟁의 장인지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다음은 지난 6년간 그녀가 눈물과 땀으로 체득한 한국여성인권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인권운동을 하다가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서울여성의전화가 올해로 25년됐다. 그런데 상담을 요청하는 전화가 여전히 많고, 사회는 폭력문제에 여전히 무관심하다. 그래서 이런 사회적 문제를 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다.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일을 겪었을 것 같다. =당연하다. 우리의 모토는 이제 “세상에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다”가 돼버렸다. 쉼터로 도망쳐온 여성들을 찾으러 가해자들이 우리 사무실을 찾는다. 공중전화를 추적하거나 피해자가 현금인출한 곳을 알아내서 찾아온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디서 단체로 교육을 받았나 싶기도 하고. (웃음) 몇달 전 다른 상담센터에선 남편이 상담사를 상대로 부인 찾아내라고 인질극도 벌였다더라. 아무튼 시나리오 쓰고 싶은 사람은 며칠만 우리 사무실에 와라. 못 들어본 이야기들이 수두룩할 거다.
-<쉼터를 만나다>를 촬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쉼터’에 온 많은 분들이 ‘내가 이런 곳까지 오다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 사실 집에서 폭력을 참고 사는 게 더 비참한 상황인데. 그래서 처음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데 설득 끝에 촬영을 마치고 영화를 보여드렸더니 우시면서 “나는 내 인생에 당당하다”고 하시더라. 그 일을 겪고 나니 영상작업이 하나의 치유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계획하는 영화가 있나. =안 만들 거다. 너무 힘들어서. (웃음) 우리 영화는 서네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드는 가내수공업이다. <쉼터를 만나다> 같은 다큐멘터리의 경우 대사가 너무 많고, 편집할 때 너무 힘들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이제 극영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시던데. 그래도… 생각하는 작품은 있다. 대한민국의 여장부를 찾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거다. 재밌지 않을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