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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애니 열전] 클래식과 애니메이션의 환상적 조우
주성철 2008-05-27

<알레그로 논 트로포> Alegro Non Troppo

제12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상영작

<알레그로 논 트로포>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또 애니메이션과 클래식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혁명적인 작품이다(여섯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아담과 이브를 만드는 클레이애니메이션 장면도 있다). 어린 시절 8개의 클래식 음악에 각각 다른 성격의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작품인 디즈니의 <판타지아>(1940)에서 영감을 받아, 브루노 보제토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판타지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 <판타지아>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끊임없이 공격받았다면 브루노 보제토는 바로 그 디즈니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며 자신의 옛 기억과 추억을 새로이 재구성한 것이다. 이처럼 <판타지아> 그 자체를 대담하게 패러디하고 있지만 부정과 전복의 정신으로 묘한 쾌감을 준다. 그것은 <알레그로 논 트로포>뿐만 아니라 그의 몇편의 장편들과 수십여편에 이르는 많은 단편애니메이션들을 관통하는 테마이기도 하다. 당시 이탈리아영화계에 네오리얼리즘의 비판정신이 있었다면 애니메이션계에는 바로 그가 있었다.

먼저 흑백 영상으로 등장하는 실사의 남자가 비통해한다. “할리우드에서 이미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고요? 아니, 이럴 수가.” 음악과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작품을 만들려던 그 제작자는 한발 늦었다며 비통해한다. 그가 거론한 할리우드 작품이란 다름 아닌 디즈니의 <판타지아>다. 이내 그는 늙은 노파들로 이뤄진 오케스트라단, 뚱뚱하고 괴팍한 지휘자, 그리고 수년간 감옥에 가둬놓았던 애니메이터를 모아 놓고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도록 지시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노파를 마음대로 내동댕이치는 지휘자와 제작자의 폭력과 협박 속에서도 애니메이터는 환상적인 애니메이션을 선사하고 음악 또한 무사히 연주된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시작으로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7번>, 라벨의 <볼레로>,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 등이 흐르는 가운데 곡조에 따라 다른 테마와 스타일의 영상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전체적인 내러티브의 진행과 연결에는 실사 영상이 삽입됐는데(가령 실사 영상의 지휘자가 던진 콜라병이 날아가 장면이 바뀌고는 콜라병 그림이 되어 애니메이션이 시작되는 식으로 연결된다), 막간을 이용해 노파들이 무대 위에서 요리를 해먹고 난데없이 고릴라가 등장해 아수라장이 되는 등 영화는 거의 엉망이 된다. 물론 그 소동 또한 나름의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다. 이처럼 실사와 애니메이션은 막간을 두고 따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재치있게 한데 섞여 있는 대목도 있다(가령 고릴라가 테이블을 뜯어내자 그 밑에서 애니메이션 물이 솟구쳐오른다).

<알레그로 논 트로포>의 화풍은 몽환적이면서 유머러스하고, 음악의 무드에 충실하면서도 초현실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적인 <판타지아>에 대한 대안으로서 날카로운 풍자의 세계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버려진 콜라병에서 생명체가 태어나 무한 증식한다든지(음악은 <볼레로>),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시커멓고 볼품없는 고양이가 폐허가 된 집에서 따뜻한 가정의 실사의 환상을 경험한다든지(<슬픈 왈츠>), 과거 <판타지아>처럼 마냥 동화적인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그 유머와 풍자의 경계도 거의 분열증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온도 차가 크다.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가족들의 영상에 즐거워하던 고양이 집이 산산조각 철거당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실사 무대의 노파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우스꽝스럽게 눈물을 흠치고 코를 풀어 휴지를 마구 내던진다. 그럼에도 <알레그로 논 트로포>는 기본적으로 재기 넘치는 애니메이션이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에서 풀밭 위를 나뒹구는 연인의 뜨거운 몸짓에 집을 잃어버린 벌이 그 남자 인간을 쏘아버리는 복수극은 여느 할리우드 상업애니메이션만큼이나 흥미로운 구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정신없이 웃고 울게 만드는 기이한 체험은 브루노 보제토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그를 단숨에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알레그로 논 트로포>는 디즈니의 세계에만 젖어 있던 애니메이션 관객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탈리아 애니메이션의 진수를 만날 기회”

시카프에서 만나는 브루노 보제토 단편 컬렉션

올해 시카프에서는 브루노 보제토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알레그로 논 트로포>뿐만 아니라, 지난 40여년간의 작품 활동을 정리하는 단편들을 모은 소중한 특별전이 열린다. 갑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자가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스터 로시의 이야기 <미스터 로시, 차를 사다>(1966)와 세상의 이치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탐구심을 상징하는 미스터 타오의 이야기 <미스터 도(道)>(1988)는 각각 칸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됐다(<미스터 도>는 최우수 단편부문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그외 인생 전체를 단 6분의 시간에 압축해 삶의 의미를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풍자한 <깡통 속의 삶>(1967), 꿈속에서 억눌렸던 무의식과 욕망에 대해 그린 <에고>(1969), 인류가 기름을 뽑아냄으로써 지구를 착취하는 것처럼 모기도 피를 빨아먹으면서 사람을 착취한다고 주장하는 <셀프서비스>(1974),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주인공을 그린 <춤>(1991) 등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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