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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현실이 된 괴담

미국 쇠고기 수입협상에 항의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한 청소년들을 조종하는 ‘배후세력’이 있단다. 맞다. 입시에 쫓겨 집에선 웬만해서 얼굴 보기도 힘든 청소년들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한자리에 모여 한목소리를 내는데 배후세력이 없을 리 있나. 십수년 전 고교 시절 이웃 학교 친구들과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을 때도 우리에겐 분명 배후세력이 있었다.

혹시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당시는 교단을 떠나는 전교조 선생님들을 향해 “제발 가지 마세요∼”라며 눈물바람을 하던 시절이었지만 시위 지도부는 전교조 사무실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순수한 우리의 뜻이 훼손될 우려가 있어서”다. 그 순수한 뜻이 무엇인고 하니, 0교시와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주초고사까지는 어찌어찌 견뎠지만 고교 경쟁입시를 도입하는 것만은 정말 못 참겠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학교가 입시 지옥이 되는 현실을 바꾸려고 모든 것을 걸었던 전교조 선생님들이야말로 우리의 순수한 뜻을 가장 잘 이해할 터였는데, 어찌 적극적으로 ‘내통’하지 않고 생폼만 잡았을까 후회가 막심하다.

정작 배후세력은 따로 있었다. 인구 16만명의 작은 도시. 여고 3개, 남고 3개가 전부인 곳에 경쟁 입시가 도입되고 교복이 부활하면, 학생들은 한눈에 1·2·3류 인간으로 구분되어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었다. 중학교에서도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이 성행할 테고 5년에 한두명꼴이던 그 지역 청소년 자살률이 치솟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나와 동생의 (그나마) 행복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다. 내가 다니는 고교가 ‘똥통학교’로 전락할 것이 불보듯 훤했으니 이 또한 비분강개할 일. 당시 학생들을 거리로 내몬 건 첫째, 이른바 수준별 맞춤수업으로 이 지역 출신 명문대생을 양산하려는 높으신 분들의 창대한 계획이요, 둘째는 삼류학교 진입을 눈앞에 두고 불안에 떨었던 내 모교의 교장 선생님이었다(이분은 겉으로는 학생의 본분을 이야기하면서 수업시간에 전교생이 시내로 몰려나가는 것을 결코 막지 않았다). 우리의 순수한 뜻은 또한 느닷없이 불거진 ‘괴담’으로 좌초되고 말았는데, “고교 경쟁입시는 곧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이며 이것이 정부의 시책”이라는 내용이었다. 정부에서 하는 큰 일이 소도시 학생 몇 천명의 반대로 뒤집히진 않으리라는 무력감이 지도부를 덮쳤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오호 통재라, 적들의 간악한 속임수에 넘어간 지도부의 어리석음이여!

십수년 전 괴담은 정작 새 정부 들어서면서 현실이 됐다. 특목고를 우후죽순 세우면 굳이 고교 경쟁입시를 도입하지 않아도 전국적인 고교 서열화가 이루어진다. 여기에 학교별 우열반 편성을 장려하고 대학들이 수능과 본고사로 신입생을 선발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했으니, 전국 시도읍면 청소년들은 바야흐로 한명도 빠짐없이 한줄로 나란히 서게 된 셈이다. 0교시,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주초고사, 주말고사, 일제고사 같은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나 학생들의 숨통을 조르는데, 급기야 광우병 위험이 있는 쇠고기가 수입돼 급식으로 제공될 판이라니 이 참담한 현실보다 든든한 ‘배후세력’이 어디 있겠는가.

말 나온 김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배후세력을 지목한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검증되지 않은 논리에 학생들이 휩쓸리고 있으며 학생들이 행동하기 전에 생각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말했는데, 서울시교육청에서 관리·감독·교육하는 서울시 학생들은 평소 거짓말에 함부로 휩쓸리고 아무 생각없이 행동하는가. 공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지금 그처럼 위험한 인간으로 길러내고 있노라고, 스스로 자인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