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오픈칼럼
[오픈칼럼] 마네킹 세대의 서울
정재혁 2008-05-16

나는 거리가 잘 보이는 카페의 테라스가 싫다. 보도보다 한발 정도 높은 나무 바닥에, 스테인리스 소리 챙챙거리는 의자에 앉아, 라테를 마시며 책을 보고, 음악을 듣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광경이 좀 밉다. 길을 걷더라도 웬만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고, 시야에 들어오면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특히 홍대 앞 C, 논현역에서 강남역으로 가는 길 오른쪽의 J, 명동 대로의 C, 청담동 검정 빌딩 앞의 T. 뭐 이 말고도 무수히 많겠지만 특히 앞의 두 C와 하나의 J, T는 테라스의 방향이나 위치, 구조, 그리고 거기에 앉은 사람들까지 이상한 뉘앙스를 뿜고 있다. 무언가 으스대고, 사방의 시선을 의식한다. 땀을 식히며,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한 휴식 같진 않다. 적당한 책과 잡지, 아이포드와 담배를 테이블 위에 놓고, 대부분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는 마치 연출된 백화점 쇼윈도의 마네킹을 닮았다.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번지르르하다. 아니, 차가 쌩쌩 달리는 2차선 도로의 앞을 치고 나온 테라스에 왜 앉아있는 건지 그냥 좀 궁금해진다. 무언가 구경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종의 시선 놀음을 즐기는 그 모습이 불편하다.

얼마 전 K선배와 이야기를 하다 의류 브랜드인 A의 명동 매장 직원들이 싸가지가 없다는 소리가 나왔다. 불친절하고 예의없으며 서비스 정신이 없단다. A매장이라면 나도 근처를 지날 때마다 종종 둘러보던 곳이라 그곳 직원들의 모습이 쉽게 떠올랐다. 싸가지? 음…, 글쎄. 그게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곳 직원들은 좀 무심하다. 손님이 들어오든 말든, 옷을 입어보든 말든, 치수를 물어보든 말든, 최소한의 말로만 응대한다. 단, 환불, 교환은 1주일 이내에만 가능합니다랄지, 택을 떼면 1주일 안에 옷을 가져와도 소용없습니다랄지, 이런 식의 멘트는 앞뒤 안 자르고 확실히 한다. 기분 좋을 건 없지만 본인만 잘못 안 하면 최소한 피해는 안 입을 곳이다. 그런데 이 매장은 포털 사이트 N에서도 싸가지없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런 일로 싸웠고, 저런 일로 싸웠으니, 이용하지 맙시다는 유의 글이 수두룩이다. 확실히 돈에 돌고 도는 서비스업에서 무심함은 욕먹을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A매장 직원들이 마네킹 같아 보인다는 게 더 크다. 매장 규모에 비해 많은 수의 스탭들은 하나같이 멋을 내고 뽐을 내듯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말로 서비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를 전시함으로써 옷을 세일즈한다. 이젠 상품을 파는 데도 상냥한 말보다 멋진 이미지가 효과적인 걸까. 점원과 손님이란 최소한의 인간적 관계마저 이곳에선 삭제된다.

최근 들어 서울의 풍경이 점점 쓸쓸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90년대 중반 X세대, 오렌지 세대들이 비디오자키마냥 시끄럽고 화들짝한 어투로 말을 걸어왔던 것에 비해 요즘 20대는 클럽의 DJ마냥 그냥 귀에 헤드폰을 끼고 혼자 고개만 들썩인다. 정치도, 개성도, 대화도 없다. 까페 테라스의 사람들이나, A 매장의 직원이나 모두 멋진 그림으로 대화를 대신하려 한다. 고민없는 외로움을 멋이라 생각하고, 속은 텅 빈 수많은 기행 조각들로 블로그를 도배한다. 싸이월드에 사진으로 올리던 일상의 이미지는 현실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카페의 테라스, 클럽, 숍, 홍대 골목 등이 무대가 된다. 90년대 신세대가 목소리 크게 외치며 자신의 존재를 주장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 신세대는 멋진 이미지를 전시하며 존재를 드러낸다. 그래서 예쁜 가게, 맛있어 보이는 음식의 사진이 중요해졌다. 심지어 자신의 모습마저 세련된 이미지로 치장한다. 멋있긴 한데 답답하지 않을까. 마네킹 세대의 서울 풍경은 왠지 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