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은 1976년 쌍꺼풀 수술을 단행했다. 사실 쌍거풀 수술하기 전의 성룡은 화려한 실력을 떠나 참 존재감없이 생겼다. 반달처럼 축 내려앉은 눈매는 쿵후영화의 처절한 복수나 고수의 카리스마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눈싸움에서는 백전백패할 얼굴이다. 그의 이후 행보를 떠올려본다면 성룡은 쌍꺼풀 수술을 하면서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다. 당시 성룡은 실력은 인정받았으되 배우로 성공하기에는 좀 난감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래도 참 열심히 하는 배우이긴 했다. 우상과도 같은 선배 이소룡과도 일찌감치 대결을 벌였다. <정무문>(1972)에서는 그의 발차기에 벽을 뚫고 저 멀리 나가떨어졌고, <용쟁호투>(1973)에서는 그의 쌍절곤에 무참하게 무릎을 꿇었다. 사실 당시 곡예와도 같은 스턴트에 관한 한 성룡과 원표를 따를 자가 없었다. 실력 좋아 찾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합기도>(1973, 한국 개봉명 <흑연비수>) 같은 한·홍 합작영화들에도 부지런히 출연했고 이때부터 한국말도 자연스레 익히게 됐다. 오우삼 감독의 <여자태권군영회>(1975)에서는 김창숙 아주머니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룡이 생각하기에 순간적인 묘기를 펼치는 것 외에 자신이 배우로 성장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절망한 그는 부모님이 살던 호주로 갔고 허드렛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나이 불과 20대에 막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니 그도 참 성급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채 1년도 안 돼 (성룡의 일대기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그가 늘 친아버지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매니저 진자강에게 연락을 받았다. <정무문>을 연출했던 당대의 흥행사 로웨이 감독이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홍콩영화계는 이소룡 사후 한국에서 건너온 용병들을 포함해 수많은 액션배우들이 군웅할거하던 시기였지만 이렇다 할 후계자는 없던 때였다. 어쨌건 주연에 목말랐던 그는 로웨이 감독과 거의 노예계약에 가까운 계약을 맺고 또 성룡이라는 예명으로 바꾸고는 <신정무문>(1976), <유성검의 대결>(1976), <권정>(1978), <비도권운산>(1978) 등 거의 혹사에 가깝게 출연했다. 하지만 변화를 꿈꾸던 그와 로웨이 감독과의 감정대립은 심해져갔고 그 과정에서 드디어 눈에 칼을 들이대게 된다.
마침 그때는 쇼브러더스와 갈등을 빚은 제작자 오사원이 자신의 이름을 딴 사원영업유한공사라는 영화사를 차리고, 역시나 무술감독 출신의 원화평을 데뷔시키려던 참이었다. 감정싸움 속에 사원영업유한공사로 임대된 성룡은 드디어 쌍꺼풀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원화평의 <사형도수>(1978)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는 늘 자신의 눈을 심각한 콤플렉스로 여겼던 걸까? 자신감이라는 측면에서 그가 쌍꺼풀을 갖기 이전과 이후의 연기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이전까지 무미건조한 연기로 일관하던 그가 쌍꺼풀 아래 인생의 희로애락을 가득 담아 연기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해 만든 <취권>에 이르러 코믹 쿵후 스타일의 완성이라는 혁명을 가져온 그는 그렇게 이소룡 사후 홍콩영화계의 새로운 황제로 떠올랐다. 단 한번의 쌍꺼풀 수술이 홍콩영화사를 바꿔놓았다면 지나친 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