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카메라 ‘코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조선영화계에 고몽, 발보, 아이모가 앞다투어 수입되는 가운데, 탐구하듯 맨손으로 만들어진 국산 촬영기가 ‘코첼’이다.
이창근은 1908년 평양 신창리 출생으로 한국전쟁 이전까지 이곳에서 활동했다. 28년에는 도쿄에 유학해 전기학교를 수료했다. 이창근은 이때의 도쿄행에 대해 “나이 많은 아내와 거상(巨商)인 아버지가 있는 살림에 애착이 없었다”고 무심하게 회고하였으나, 전기학교 유학과 그곳에서 경험한 일본의 시대극은 이창근의 영화활동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이창근은 ‘서선키네마’(1932)와 ‘동양토키영화촬영소’(1939)를 설립하고 직접 만든 영화기계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동양토키영화촬영소’는 촬영, 녹음, 현상 시설을 모두 갖춘 150평 규모의 촬영소로 대부분 이창근 자신의 제작품으로 꾸며졌다.
토키영화의 수입에 자극받은 이필우가 일본 영화인들과의 동반연구로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1935)을 성공시킬 무렵, 이창근은 3년간의 연구 끝에 발성영화 제작이 가능한 독자적인 시스템을 평양에 실현시켰다. 이때 만들어진 발성영화 <처의 모습>(1939)은 평양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비슷한 시기에 많은 지방 제작사들이 자본을 중심으로 개폐를 거듭하던 사정과 비교할 때, 기술적 전환을 수용하며 20년 가까이 지속된 이창근의 영화활동과 그의 평양 촬영소는 주목할 만하다. 서울의 영화인들과는 독립적으로 전개된 그의 이력과, 회고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평양 영화계의 사정은, 지금은 잃어버린 반쪽 북한의 영화사에 대한 상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1942년 일본의 전시(戰時)정책으로 전국의 영화사가 강제 폐쇄되면서 이창근의 영화 활동도 중단되었으나, 54년 서울에서 다시 만들어진 ‘코첼3호’는 <인생화보>(1957), <세쌍동>(1959) 등의 작품을 남겼고, 이창근은 1970년대까지도 기계 제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가 애 적에는 평양에 극장이라는 것도 없었고, 영화를 구경한다고 하는 것은 더더욱 없고. 꼭 한번 할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일이 있다. 남의 뜨락을 얻어가지고 탈춤을 한다 해서 갔더니 영사기를 갖다놓고 돌리는데, 상자에다가 사람을 집어 여놓고 밑에다가는 폭탄에 불을 붙이니, 죽지 않고 뛰어나와서는 또 엉덩짝에 불이 붙으면서 도망가고, 뭐 그런 사진이 기억이 난다.
그렇게 활동사진 한번 구경한 일이 있고. 정식 극장, 어른들의 극장에는 못 가봤지만, 늘 하는 장난으로 연극하고 환등을 했다. 밤이면 연극한다고 장을 쳐놓고 성냥 한갑씩 받고 출입을 시켰다. 환등도 원리가 간단하다. 종이에다가 그림을 그려가지고 비추는데, 투명이 안 되면 종이에 초칠을 한다. 여기에 100볼트 전기를 넣고, 요즘 슬라이드 모양으로 로프를 들어가게 하고 렌즈를 비추면 두어간 바깥까지 거뜬히 뵌다. 공부는 언제나 낙제나 면해 올라가고 그랬고, 연극하고 환등하고, 여나믄살 때까지 그런 장난을 하면서 수업을 한 것이라고 봐도 될 테지.
열네살 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장남으로 장가들게 되면 신부된 사람은 살림을 봐야 될 사람이니까 나보다 네살 위에다가 약혼을 시켜놨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장사하느라고 집에 돌보지 못하고, 누님 또 동경 치과전문학교 가서 공부하느라고 집도 비우고, 나는 나대로 집에 애착도 나지 않고 해서 누님 있는 동경에 갔다. 그때부터 이제 내가 영화에 바람이 나게 됐다고.
“찍을 땐 싱거웠는데…, 영화라는 것이 이상하구나”
한 이십살 됐을 땐데, 시부야 하숙집에서 지내게 됐다. 어디 학교라도 댕겨야 되겠는데, 공부는 원체 취미도 없고 전기학원이라는 게 있어 다니기 시작했다. 생도라고 한 스무명밖에 안 되고 사십난 노인네도 끼어 앉아서 주로 라디오 같은 것을 배웠다. 하루는 등교하느라고 가는데 트럭에 배우들이 전부 타고 떠나는 것을 봤다. 택시를 집어타고 그 길로 따라가는데, 지금 생각에 아마 후지산 산비탈쯤 되는 곳에 가서 내렸다. 촬영을 하는데, 칼싸움하는 그 동작이 빨르지 않고, ‘이찌 니’, ‘기무라 쿤(君) 나와라!’ 그러면 상대쪽에서 기무라라는 사람이 휙 돌아 칼을 떡 대고 찌른다는 것이 또 ‘이찌 니’, 아주 슬로 모션으로 장난 같거든. 얼마 있다가 시부야 앞에 조그만 극장이 있는데, 그 영화가 간판에 올라가 붙었다. <시미즈 지로의 잇가>(淸水次郞長の 一家). “야, 저거 찍던 거다” 들어가 보니, 칼싸움을 하는데, ‘짝짝짝짝’ 아주 뭐 쾌활하고 정말 살상이 농하게 뛰논단 말야. 찍긴 싱겁게 찍었어도 영화라는 것이 이상하구나, 거기서 흥미를 느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장사하느라고 그러고 여편네는 살림하느라고 그러고, 누가 말리는 사람이 있어? 그때부터 촬영기를 맨들어가지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착수한 것이 소화 4년, 1929년이다. 지금이야 ‘코첼 1호’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그때는 뭐 이름도 없었고, 기본 재료로는 시계 태엽을 톱니 삼아 만들었다. 톱니가 한 코마씩 얽어매서 긁어내리고 셔터만 돌아가면 됐지 다른 무슨 특수한 원리가 없기 때문에 만들기는 상당히 쉽다. 한 바퀴 돌리면 이쪽은 여덟 코마가 내려가고 내려갈 적에 셔터만 가렸다 뗐다 하면 되고 또, 렌즈는 하나고 삔(핀) 맞추고 가리고 들어오면 되는 거다. 그걸 맨들어가지고, ‘서선키네마’라는 간판을 붙이고 <돌아오는 영혼>이라는 첫 작품을 만들었다. ‘서선키네마’라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 집이지. 간판은 들어가는 문에다 달고, 사무실은 이층에다 맨들고, 뜨락에 현상소를 만들어서 거기서 현상하고 햇빛에 말리고 그랬다.
<돌아오는 영혼>은 시나리오도 내가 다 썼고, 특수촬영도 해넣은 영환데, 제목이 문제가 돼서 바로 흥행에 붙이지는 못했다. 그때는 전라도 사람들이 생계가 힘들어서 북간도로 전부 이민을 갈 때다. 바로 그 스토린데, 북간도로 이민간 조선인이 거기서도 중국사람의 압박을 못 이겨 죽는다, 죽었지마는 그 영혼만은 돌아와 한국을 지킨다, 그래서 <돌아오는 영혼>이다. 죽은 영혼이 압록강 철교 위로 날아오는 모습에서 특수촬영이 들어갔다. 32년에 찍고, 33년에 검열 맡으러 총독부에 올라갔는데, ‘다마시이(魂靈)가 와루이(惡い)!’ 제명이 불순하다 해서 재깍 제동이 걸렸다. “‘돌아가는 영혼’으로 하지 왜 ‘돌아오는 영혼’으로 하느냐, 북간도도 살기가 좋으니 북간도로 가는 걸로 개작을 해라“ 개작비 십오원 더 들여가지고 검열 다시 올라갔더니 통과가 됐다.
그 무렵에 평양에서 영화에 관계한다 하는 인물로서는 정기택이 있었다. 기택씨의 아버지가 장별리에서 미곡상을 하고 있었는데, 서울서 이경손씨가 내려와가지고 북경루에서 촬영도 하고, <춘희>를 찍은 일이 있다. 기택씨는 주로 서울 클럽하고 손을 잡고 하고, 나는 나대로 평양에서 했지 별다른 유대는 없었다. 또 영화를 백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서울하고 평양하고밖에는 없었고…(<춘희>는 1928년, 이경손 감독, 정기택 출연으로 평양키네마사가 제작한 작품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창근의 평가로 보아 평양키네마사의 경우 제작 조건을 확보하고 안정적으로 활동한 영화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희>는 정기택이 아버지를 통해 자본을 대고 서울의 스탭을 초빙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자본을 따라서 일시적으로 인력을 구성하고 영화사 이름을 걸었다가 흩어지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영화 제작 방식이기도 했다.- 필자).
사실감 살리려 함경도 설원으로 로케
2회 작품은 <도회비가>(1934)다. <돌아오는 영혼>이 제일관에다 붙여가지고 180원 수입을 벌어줬기 때문에 그해 가을에 곧 시작했다. 1회작에는 이름없는 기생을 주연으로 썼지만 이번에는 좀더 진보적으로, 연극계에 있는 사람도 쓰자 해서 ‘연극호’(당시 평양에 있던 직업 극단. 가설 극장을 세워 두세달씩 공연을 했다고 한다.- 필자) 사람들을 등용하고, 촬영도 내가 하지 않고 서울에서 한창섭(이경손- 정기택 진용에서 주로 활동한 촬영기사. <산채왕>(1926년), <춘희>(1928년) 등을 촬영하였다.- 필자)을 내려오게 했다. 다 모아놓고 보니 여러 사람들 제안이, “돈도 있고 한데 왜 평양시내에서만 백이느냐, 로케를 가자.” 눈을 배경으로 찍기 위해서 함경북도 웅기로 로케를 갔다. 눈이 많은 곳이라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보통 1m는 쌓인다. 적설을 배경으로 싸우는 장면을 백이는데, 저쪽에서 총을 쏘면 네 활개를 펴서 큰대자로 자빠졌다가 또 총을 쏘며는 눈 속으로 쏙 들어가 상대방 뒤로 나와서 뒤통수를 치는, 그런 장면을 표현했다.
문제는 총인데, 총구녁에서 연기가 안 나니까 재미가 없었다. 총은 총대로 꽝 하면, 변사가 ‘꽝!’ 한대는 거보다도 이 장면을 어떻게 실감하게 할 수 없겠는가, 이런 아이디어로서 생각한 것이 엽총을 얻어 쓴다는 것이었다. 엽총을 구해가지고 탄환은 빼고 쏘아도 연기만 나게 하면 되지 안 하겠냐 말이지. 허가를 받기 위해서 여관 주인을 앞세우고 일본 순사부장을 찾아갔다.
정리 이기림/ 동국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과·이영일출판프로젝트 연구원 marie320@hanmail.net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