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유튜브! 인터넷을 서성이다 창 몇칸을 열었더니 열세살 장한나의 워싱턴 케네디센터 공연 실황이 떡하니 뜬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앉은키가 소녀의 정수리 높이와 어슷비슷하다. 하이든 첼로협주곡 다장조의 활주하는 피날레 3악장. 몸통 높이가 소녀의 빗장뼈를 넘나드는 첼로가 어르는 대로 요동치니 행여 넘어질까봐 조마조마한데 웬걸, 장한나는 곡의 9부 능선에 다다르자 지휘자 아저씨를 향해 씨익 미소를 날린다. 칭찬을 바라거나 예우하는 웃음이 아니라, 카우보이가 나란히 말 달리는 동료에게 부는 휘파람 같은 미소였다.
음악 신동은 클래식 음악산업의 주요한 엔진이다. 장한나는 그러나 처음부터 신동과 영재라는 말이 은근히 암시하는 정신적 미숙과 서커스적 기교의 결합과는 거리가 있었다. 꼬마 천재 타이틀을 공유한 중국계 피아니스트 헬렌 황과 런던 바비칸센터에 장한나가 나란히 선 1995년, <인디펜던트>는 장한나의 정체 모를 원숙함과 헬렌 황의 철두철미한 기교를 대비했다. “한나의 연주를 듣고 나서 환생을 믿게 됐다”고 말한 첼로의 거장 미샤 마이스키가 목격한 것도 아마 같은 유령이었으리라. 장한나의 이력은 지루하도록 혁혁하다. 7살 국내 콩쿠르에서 우승, 8살 서울시교향악단과 첫 협연, 9살 줄리아드 예비음악학교 장학생 진학, 11살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 우승, 총 6장의 음반 가운데 프로코피에프 교향적 협주곡을 녹음한 4집(2003)은 ‘그라모폰 협주곡 부문 올해의 음반상’을 위시한 영예를 누렸고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과 소나타에 도전한 5집(2005)도 스승 로스트로포비치에 꿀리지 않는 표현력을 과시했다.
예상 못한 커브는 그 다음이었다. 조용히 준비를 마친 장한나는 2007년 여름 MBC 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지휘자로 데뷔했다.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이 기획은 올해 봄까지 이어졌다. 연출을 맡은 김승환 PD는 “공중파TV에서 베토벤 교향곡을 전곡 연주하는 희귀한 기회를 장한나라는 이슈에 기대어 얻어냈고, 그녀는 음악을 대중에게 돌려주는 소망을 실현했다”고 요약한다. 지난 4월 초 다시 내한한 장한나는 황병기 교수와 함께한 콘서트에서 가야금 협주곡 <새봄>과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을 지휘했다. <전원>에 앞서 장한나는 마이크를 잡고 전 악장을 청중에게 메주밟듯 안내했다.“뻐꾸기가 노래하면 2악장이 끝난 거예요. 하하.” 기자들이 한시바삐 일로매진해 자클린 뒤 프레를 추월하는 첼리스트가 되지 않고 웬 샛길이냐는 희미한 책망을 담아 ‘외도’의 동기를 물을 때면, 장한나는 “너도 이제 아이가 아니니 다른 사람을 위해 뭘 할지 생각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물론 지휘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흥분도 감추지 않았다. 돌아보면 유사한 파문(?)이 예전에도 있었다. 장한나가 음대 아닌 철학과에 진학해, 인간이 어디서 와서 왜 이렇게 사는지 공부하겠다고 밝혔을 때였다.
훌륭한 음악, 행복한 생을 위해 장한나가 내리는 선택은 대범하다. 나라는 인간을 근사하게 만들면 내가 하는 연주도 당연히 근사해지고 우수한 지휘자가 되는 일이 첼리스트로서 성취를 갉아먹을 까닭이 없다는 당찬 신념이 그녀의 대들보다. 유치원 시절 장한나는 심장 전문의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멈추면 안 되는 근육에 어떻게 메스를 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란다. 과연 스물여섯의 장한나는 외과의사처럼 담대하고 치밀하다. 가르치고 설득하는 교사 기질과 모성 본능도 충천하다. 그녀에게 돌더미를 안기면 성을 쌓을 것이고 조직을 주면 보스가 될 것이다. 음악과 현실세계의 오차는 장한나에게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아니, 음악은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장한나에게 진정한 세계다. 오해없이 소통하려면 말보다 음악이 낫고, 희로애락도 음악 속에서 한층 농밀하게 맛본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음악은 그녀보다 오래 살 것이다. 하지만 장한나는 자신이 한없이 가느다란 현(絃) 위에서 걷고 있음도 안다. 첼로는 미세한 미끄러짐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곤두박질치는 반음의 악기이며, 음악은 만족하는 순간 죽어 박제가 되는 요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늘을 만끽하기 위해 벼랑에 사는 것이 익숙해진 젊은 독수리의 눈빛을 장한나가 가진 이유다.
-첼로를 연주할 때 입술을 달싹이는 장한나씨 특유의 표정은 흡사 첼로를 성대 삼아 노래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장한나씨 지휘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 건, 지난 4월5일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황병기 선생과의 협연이 처음이었는데요. 단원들쪽으로 상반신을 깊이 굽히고 양팔을 한껏 벌리는 제스처가 첼로를 끌어안는 동작과 비슷하더군요. 어쩌면 첼로도 오케스트라도 자기 몸의 연장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맞게 보셨어요. 첼로를 다룰 때는 첼로가 제 분신 같지만 오케스트라는 사람들의 집단이고 그들의 마음이 있으니 더욱 살아 숨쉬는 악기죠. 오케스트라는 공연할 때쯤 되면 단원들과 굉장히 정이 많이 들어요. 지휘단(podium)에 올라서 보면 정말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다워요. 그들의 마음을 제가 연주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악기를 연주할 때는 본인의 음악적 해석이 신경을 통해 곧장 실천으로 이어지지만 오케스트라는 그렇진 않을 텐데요. =그래서 단원들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적어도 저의 체험에 따르면, 곡에 대한 저의 열정과 의지를 표현하면 단원들에게 반드시 전해져요. 진심은 통해요. 첼로야 제가 “이렇게 해야지” 마음먹으면 저도 모르게 첼로가 그렇게 움직이죠. 반면 오케스트라는 말이 많이 필요해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가고 의도적으로 음악을 만들어가는 기쁨이 있죠. 하지만 노력한다고 꼭 목적한 소리가 나오느냐? 그건 아니죠. 지휘자의 생각을 단원들이 이해하고 진정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기까지 반복적으로 요구를 해야죠. 그래서 원했던 ‘그 소리’가 나오기까지는… 에…(웃음) ‘외교’를 해야 해요.
-<장한나의 다큐 콘서트>를 연출한 MBC 김승환 PD에게 물었더니 베토벤 교향곡 해설할 때 시청자에게 멜로디를 환기시키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첼로로 몇 소절을 켜는 소리가 무척 아름다웠다고요. 실제로도 첼로로 흥얼거리면서 지휘를 준비하나요? =아닙니다. 피아노로 준비하고 그 다음에는 조용한 공간에서 악보를 보며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파트마다 하나씩 들어요. 제1바이올린을 듣고, 그 다음에는 제2바이올린을 듣고…. 그렇게 총보 전체가 그냥 머릿속에서 들리도록.
-한나씨가 지휘를 시작한 이유는 언론에 설명한 바에 따르면 두 가지 정도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음악가로서 자신이 누린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데 그 길은 청소년에게 클래식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라는 악기가 필수적이라는 설명이죠. 둘째는 첼로 레퍼토리 한계도 있지만 큰 음악가가 되기 위해 넓게 파는 길을 택했다는 이야기고요.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혹은 더 비중이 큰 동기인가요? =두 가지 다 같은 무게였어요. 어쩌다 보니 거의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앞으로 50년 더 첼로를 한다면 알면 알수록 점점 현미경으로 디테일을 보는 일밖에 안 남아요. 시야가 좁아지는 위험이 있죠. 또 음악은 스스로 새로운 열정을 갖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져요. 그래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연주가 똑같은 음악인들이 있는 거죠. 이야기 나눠보면 그 자신도 알아요. 재미없다고, 하기 싫다고 해요. 그런데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한 게 그것뿐이니까.
-본인도 그런 위험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하죠. 아무도 예외가 아니죠. 최대 과제는 스스로의 음악성을 성장시키는 것인데 그럼 어떻게? 저는 도전을 할 때 가장 많이 성장을 하는 유형이에요. 여태 접한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 훨씬 복잡한 것, 훨씬 긴 것, 뭐가 됐건 다르고 새로운 것을 하고 나면 많이 커요. 그런데 지휘를 몇 차례 해보고 나니까 엄청나게 재미있어요. 성격에 맞고 하고 싶어했는데 보람까지 있으면 그것이 뭐든 중독되는 것 같아요. 지휘는 어려서 하다 1등 하는 바람에 계속 하게 된 일이 아니라, 성년이 된 뒤 의식적으로 날 위해 선택한 일이기도 하고요.
받은 축복만큼 뒤따르는 대가와 역할
-어린 시절 외국 언론 인터뷰를 보니 가장 자주 하는 대답이 “왜 안 되죠?”(Why Not?)였다면서요. =아하하, 맞아요. 부모님은 옛날부터 저더러 첼로 하기 싫으면 언제든 그만하라고 하셨거든요. 심지어 연주자가 된 다음에도. 덕분에 저는 늘 “이 일을 꼭 원하는가”라고 자문하며 살았고 따라서 한번 사는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왜 안 돼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감수성을 키워주기 위해 어린 한나양을 어머님이 다양한 공연에 데려갔다고 읽었습니다. 음악적으로 예민한 감각을 지닌 아이에게 연주회는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자극이 될 수도 있다던데, 특별한 기억은 없는지요. =항상 모든 것은 육체적으로 와요. 마음에 닿는 감동은 모두 육체적인 것 같아요. 닭살이 돋는다는지, 눈물이 흐른다든지, 웃음이 난다든지. 그런 현상이 슬프다는 생각과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물론 다섯살 아이한테 황병기 선생님의 <미궁>을 들려주면 무서워할 수 있고 말러 교향곡을 들려주면 어려워할 수 있겠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굉장히 재미있기만 했어요.
-아홉살에 줄리아드 예비음악학교에 받아들여져 미국에서 공부했고 연주여행을 하며 살고 있는데요. 외국어의 발음과 억양을 익히는 데에도 청각이 예민하다는 점이 영향을 주겠죠. =음악가들이 귀가 좋죠. 예를 들어 여름에 에어컨을 틀었는데 탈탈탈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나면 굉장히 거슬려요. 그리고 어디서 왜 소음이 나는지, 뭐가 떨려서 나는 소리인지, 뭐가 어긋난 건지 금방 찾아내요.
-신동이라고 불렸던 시절, 노련한 연주를 하면 아이다운 유희성이 없다고 비판하고 감정적으로 연주하면 음악적 깊이의 결핍을 운운하는 평 사이에서 힘들지 않았나요? 세상은 대체 나한테 뭘 요구하는 걸까 하는 의혹일 수도 있고. =(딱 잘라) 상관없어요. 그걸 넘어설 만한 자신감이 있으니 연주라는 걸 하는 거잖아요. 2천∼3천명 앞에 서서 아무 생각없이 연주를 한다면 오래갈 수조차 없어요. 최선을 다하면서 그만한 확신이 없다면 예술가로서 살기가 너무 고달파요. 아니 살기 불가능해요.
-천재를 자녀로 두는 일은 장애를 지닌 자녀를 키우는 것만큼 한 가족의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장한나씨 부모님도 딸의 교육을 위해서 그때까지 쌓은 한국에서의 삶을 청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데요. 자기 존재가 가족의 운명이 됐다는 무거운 사실에 빚진 마음은 없나요. =늘 생각하고 감사해요. 처음에는 엄마와 저만 뉴욕으로 떠나려 했는데 출국 2, 3주 전 아버지께서 갑자기 같이 가겠다고 했어요. 아빠를 볼 수 없는 환경이 저한테 좋을 리 없다는 생각이셨어요. 가족이란 같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평범한 가족이 같이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구석기 시대부터 그런 양식이 내려온 것이겠죠.
-구부러지거나 접힌 데가 없다는 인상입니다. 사실 남이 듣기엔 그저 순탄하게 들리기만 하는 인생이긴 합니다. 달랑 오디션 테이프만으로 줄리아드 입학 허가를 받고, 미샤 마이스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거장에게 대가도 없이 제자로 받아들여졌고. 아마 그런 경험들이 “뜻하고 노력하면 못 이룰 일 없다”는 낙천적 성격을 형성한 게 아닐까요. =축복 많이 받은 게 사실이죠. 뉴욕으로 떠나기 전 아버지가 “너 정말 첼로가 그렇게 재미있니, 꼭 미국 가서 하고 싶니?”라고 물으셨을 때 아무 생각없이 재미있다고 해서 가게 됐고, 그러다 콩쿠르에 나가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을 뵙고. 그런데… 그만큼 노력을 했어요.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요. 혹시 평범한 재능을 가진 음악가들의 삶을 상상해본 적 있나요? =없어요. 다 주어진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교회를 다녀서 그런지 몰라도 모두에게 주어진 역할과 그만큼의 짐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제가 재능이 특출하고 어려서부터 각광받아 아무 탈없이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죠. 그런데 “아무 탈없이 성장”하기 위해서… (말을 잠시 줄였다가) 수두, 홍역 안 걸렸다고 감기 안 걸리는 건 아니잖아요? 교통사고 안 났다고 다른 상처 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축복에는 그만한 대가와 짐이 항상 따라요. 평범함의 기준은 사람마다 주관적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평범’은 제 모습이에요.
-한나씨가 간절히 원했으나 능력과 기회가 허락되지 않아 실패하거나 거절당한 기억이 있나요? =그런 심오한 질문을! 인생에 실패가 어디 있어요.
-아니, 개념을 그렇게 넓게 잡지 말고요. =아홉살 때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이 내한공연을 했어요. 연주회가 끝나고 직접 만나 뵙고 싶었는데 제지당했어요. “대학원생들도 마스터클래스 겨우 참석하는데 너 같은 꼬마가 감히…”, 그런 논리였죠.
-그런데 한나씨는 저분은 내가 당연히 만나야 할 분이라고 생각했군요. =정말 이해가 안 갔어요. 그분을 만나고 싶었고 충분히 만날 만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겐 첼로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만나면 그분의 시간을 내가 낭비하진 않을 것 같았는데 차단된 거죠. 오히려 그게 계기가 됐어요. 속이 상해 자료를 검토해보고 선생님 만나려면 이 길이 제일 빠르겠다 싶어서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나건 거니까요. (좌중 웃음)
-첼로 거장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스스로 악기를 지목해 첫 인연을 맺은 예가 대부분이더군요. “저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조르거나 바이올린을 첼로처럼 들고 켠다거나. 장한나씨도 첼로를 만난 순간 그런 즉각적 친밀감이 있었어요? =친구 만난 것처럼 좋았죠. 키도 비슷했고요. 반면 피아노는 가지고 다닐 수가 있나, 페달 밟으면 선생님이 페달 밟지 말라고 하시질 않나. 양팔을 뻗어도 몸이 작으니 건반 양끝에 손도 안 닿았죠. 낮은 음과 높은 음을 한번에 못 낸다는 점이 싫었어요. 얘는 내가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아니다 싶었죠. 흐흐.
-친구들과 놀다가 첼로 연습을 위해 “난 이만 들어가봐야 해”라고 말하는 일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아뇨. 항상 연습을 먼저 하고 놀았어요. 놀기부터 하면 너무 열심히 놀아 주체가 안 되거든요. 전, 놀다가 끊을 수가 없어요. 하하.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몰두해서 놀죠. 하지만 특별히 연습하는 모드에서 노는 모드로 전환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연습할 때는 첼로 가지고 노는 거고, 그 다음엔 친구하고 노는 거고.
경계선이 없는 음악 세계
-지금까지 여섯장의 앨범을 녹음했습니다. 차례대로 인터뷰를 읽어보면 성숙해감에 따라 레코딩과 공연에 대한 생각이 좀 변한 것 같습니다. 1집을 녹음한 1994년에는 공연과 녹음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공연할 때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박수 갈채를 듣지만, 녹음할 때는 편한 옷을 입고 아늑하게 한다”라고 답하더군요. 그런데 2집 인터뷰에선 “청중을 상상해야 하고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 때문에 레코딩이 더 어렵다”고 말했거든요. =녹음은 무엇보다 평생 남는다는 점이 무거워요. 공연장에선 즉석에서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악상을 바꾼다거나 달리 연주해보는 것에 부담이 없죠. 하지만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갈 때는 50년 뒤에 들어도 훌륭한 연주일지, 100년 뒤의 사람들도 듣고 진심을 전달받을지 아주 신중해져요. 더이상 청중을 상상하진 않지만 사실은 미래의 청중, 무수한 청중을 염두에 두는 셈이죠.
-공연 중 활의 현이 끊어졌다는 기사를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활이 부러진 적도 있죠? 그게 무슨 의미예요? =저도 활 털이 왜 이리 자주 끊어지고 활이 부러지는지 잘 몰라요. 흐흐. 힘이 센 거죠.
-장한나씨 음반 가운데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1번과 프로코피에프 곡의 인상이 가장 강렬합니다. 러시아 소설도 유난히 즐겨 읽는 편인 것 같은데 혹시 러시아 문화에 특별한 친화감을 느끼는지 궁금하더라고요. =꼭 러시아 음악을 편애하진 않아요. 연주자에게 중요한 건 그때그때 완전히 심취되는 것이에요. 본인이 지금 이렇게 연주하지 않으면 제명에 못살 만큼 갈급하게 연주해야 감동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러시아는 확실히 특별한 나라 같아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보면 러시아인들의 사고와 심리는 참 복잡해요. 땅은 어마어마하게 큰데 부유층은 한줌이고, 다혈질이면서 잘 뭉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못살게 구는(웃음) 재미있는 나라죠. 한편으로 그들 마음에는 깊은 어둠이 있어요. 겨울엔 뭐 하도 추워서 나갈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책을 쓰거나 읽거나 하는 거죠. 밀폐된 공간에서 부대끼며 사니까 스트레스도 많이 쌓일 거고요.
-일찍 연주자가 되어 아버지나 할아버지뻘 음악가들과 협연해왔습니다. 리허설은 각자의 곡 해석이 충돌하고 마찰하는 과정일 텐데, 어린 연주자로서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워낙 저를 예뻐해주셔서…. (웃음) 연주할 때도 지휘할 때도 저의 곡 해석은 저에게 하나의 ‘사실’이에요. 남들이 아직 모를 뿐인 명백한 사실. 물론 상대방의 견해도 그에겐 마찬가지죠. 고집을 끝까지 피울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엔 충돌을 해놓고 보니 그쪽 아이디어가 재미있을 것 같아 따르기도 해요. 대화로도 풀지만 결국 솔루션은 늘 연주 도중 발견돼요. 음악의 세계는 언어의 세계보다 훨씬 경계선이 얇아요. 거의, 없어요. “여긴 좀 우아하게 가자”고 말했다면 ‘우아’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음악적으로 살짝 어찌어찌했을 때의 ‘우아’는 아주 달라요. 훨씬 세밀한 차이가 가능한 거죠. 그래서 답은 언제나 말이 아닌 음악 안에 있어요.
유목민, 그리고 그녀의 오랜 친구 과다니니 첼로
-“죽은 사람들이 쓴 책만 좋아한다”고 농담을 한 적도 있지만 독서 취향이 참 고전적이더군요. 러시아 문학이니 영국 빅토리아 소설이니, 언급하는 작가들도 예를 들어 폴 오스터가 아니라 찰스 디킨스, 사뮈엘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도스토예프스키잖아요? 좋아하는 영화도 그래요. 82년생이 웬 <카사블랑카>?(웃음) 시간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작품에 시간을 할애하기 싫어서인가요? =잘 몰라요.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책들이 분명히 있어요. <안나 카레니나>는 읽을 때마다 새롭죠. 영화도 한국영화는 접할 기회가 별로 없고 제가 미국에 살아서 그런지 요즘 미국영화는 대충 바보짓을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코미디 아니면 과하게 폭력적인 영화들만 있는 것 같아요. 보다가 나온 영화도 있다니까요. 제니퍼 로페즈 나온 납치극(아마 <질리>를 말하는 듯-편집자).
-아니, 뉴욕에 거주하니까 마음먹으면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을 텐데 어쩌다? =우하하. 마케팅의 성공이죠. 현혹됐죠. 저는 영화보다 연극이 더 좋아요.
-하긴 장한나씨가 본 영화 대부분은 기내영화 아닐까 짐작은 했어요. 스스로도 유목민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잖아요. 전 유럽인들이 단지 다른 문화, 다른 나라와 문턱 낮은 국경을 맞대고 수시로 넘나들며 살아간다는 이유로 부러울 때가 있어요. 그런 환경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고 관용에 대해 일찍 가르쳐줄 것 같아서요. 세계가 나와 다 관련있는 곳이며 인류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자신과 관계가 있다고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겠죠. 정착하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이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는 부분은 없습니까? =음, 연주여행을 많이 다니니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새로운 정책이 생기면 저한테 그것들이 모두 직접적으로 크든 작든 영향이 있어요. 지난해인가 독일에서 결혼에 유효기간을 두자는 주장을 편 정치인이 있었어요. 한번 결혼하면 유효기간을 5년 두고 그 기간이 끝나면 원하면 갱신을 하고 아니면 그냥 끝내자는 거죠. 이혼 개념을 없애는 거예요. 물론 통과는 안 됐지만 재미있었어요. 하하. 예컨대 그것도 혹시 제가 독일에서 결혼하면 저와 관계가 있는 거잖아요. 요전엔 아테네에 연주하러 갔다가 <CNN>에서 숭례문이 탄다는 거예요. 공연장 갈 시간인데도 기다려서 봤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너무 신경질났어요. 말도 안 돼!
-보통 사람은 몇개의 주요 생활공간이 있어요. 집, 일터, 학교 이런 식으로. 하지만 한해 40∼50회 연주여행을 하는 한나씨는 그 공간의 수가 더 많고 널리 퍼져 있는 셈이에요. 그 멀리 떨어진 도시들을 왕복하면서도 편하게 느끼는 나름의 사적인 장소들이 많이 생겼나요? =가는 곳마다 꼭 만나는 사람과 들르는 곳이 있어요. 서울에 오면 꼭 만나는 친구 한두명 있고 뮌헨에 가도 그렇고. 어떤 도시에선 자주 가는 식당이 있어 일주일 동안 그 식당만 가기도 하죠. 그런 사람과 장소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생활이죠. 15년쯤 연주를 하니까 이 도시에 가면 이 호텔, 그중에서도 같은 방에 머물려고 애씁니다.
-비행기와 호텔에서 생활하는 법에 대해 매뉴얼을 쓸 수도 있겠어요. 무엇보다 첼로와 안전하게 동행하는 것이 급선무겠죠. =비행기도 ‘첼리스트 친화적’(Cellist-friendly) 항공사가 있어요. 악기 때문에 말도 안 되게 비행기에서 쫓겨난 적도 있죠. 브리티시 에어웨이는 첼로를 좌석에 거꾸로 묶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서 타지 않아요. 에어 프랑스도 첼로 보딩 패스 받는 데에 여덟 시간씩 걸릴 때가 있어요. 끝까지 안 태워주다 손으로 보딩 패스를 써서 막차 타게 하고. 말도 안 돼요, 진짜!
-혼자 있을 때 첼로를 부르는 애칭이 있나요? =그럼요. 첼로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말도 걸죠. 애칭은 비밀이에요. 하하. 영하 20도에 육박한 지난 1월에 시카고에서 연주회를 마치고 차까지 첼로를 들고 가다가 차문 앞 얼어붙은 땅에 미끄러져 꽈당 넘어졌어요. 다들 놀라 제 안부를 묻는데 전 첼로 케이스부터 열어보라고 기겁했죠. 십년감수했어요. 제 악기는 250살이 넘었어요(1757년산 과다니니 첼로-편집자). 나무도 마를 대로 다 말랐고,악기로서는 딱 절정기죠. 큭큭. 300살쯤 되면 늙은 축이고 지금이 아주 좋을 때예요. 사람으로 치면 40대죠.
음악을 연주함은 곧 삶을 연주하는 것, 뜨겁게…
-장한나씨는 아주 일찍부터 프로페셔널이 됐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가족과 주변의 돌봄을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됐죠. 18살이면 독립하는 미국 관례와 달리 부모님으로부터 독립된 공간도 갖지 않았고요. 부모님의 집을 벗어난 내 집, 내 작업 공간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어요? =저보다 아빠가 몇년 전부터 독립하라는 말을 하셨어요. 그래서 집도 여러 번 보러 다녔고요(그녀가 살아온 집은 뉴욕 시내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교외다.-편집자). 결국 저희 가족이 찾은 대안은 공간이 내부적으로 분리된 약간 큰 집으로 이사한 거예요. 별채는 아니지만 거실을 중심으로 왼쪽은 제가 생활하는 공간이고 오른쪽은 부모님이 지내는 곳으로 딱 나뉘어져 있어요. 다행히 MBC 다큐멘터리 촬영 때 집을 공개한 다음 이사했죠. 하하. 제 공간을 채울 가구도 직접 골랐어요. 이제 뉴욕으로 돌아가면 다음주 수요일에 마지막 가구가 배달될 거예요.
-예전에 대중음악은 춤추거나 흥얼거리지만 “클래식은 침묵의 음악이다”라고 대비시켜 말했던 기억 나요? 좀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록 콘서트에 가면 소리지르고 박수치며 음악을 듣지만, 클래식 음악은 그게 안 돼요. 1년에 한번 그런 일이 있죠. 비엔나 신년음악회. (웃음) 클래식 음악은 귀를 기울여야 해요. 심지어 지휘자도 악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소리라는 개념을 놓고 볼 때 클래식 음악의 소리가 가장 콤플렉스하게 정돈된 음향의 조화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절대적인 상이 마음속에 있나봐요. =좋은 소리, 있죠. 소리가 예쁘고 밉고를 떠나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소리가 좋은 소리예요. 그런 점에서도 클래식 음악의 소리가 우수하고요. 클래식 음악의 소리는 멜로디와 반주로 구분되지 않은 채 그 사이 사이에 무수한 구조가 있어요. 맞아요. 건축적인 거죠. 그냥 흥얼거리는 노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과학적으로 구조가 잡혀 있는데 거기 다른 소리가 끼어들면 소리의 구조가 민감하게 깨져요. 몰레큘(분자)의 조직이 깨지면 안 되는데 말이죠. 말러 교향곡을 한 시간 넘게 연주하면 별의별 소리가 다 나는데, 그 정교하게 설계된 소리 구조를 방해하는 잡음이 끼면 그 소리가 더이상 아니죠.
-그렇다면 공연하며 본인이 느끼는 소리와 복제된 음향, 즉 방송이나 음반에서 들리는 소리의 차이 때문에 속상할 때가 있겠네요. =녹음하러 가면 항상 저의 첫 반응은 이래요. “저거 내 소린 아닌데요.” 소리의 복제는 그만큼 어려워요. 오차를 염두에 두고 녹음을 진행해도 결국 달라요. 녹음할 때 느끼는 건 곡이 진행되며 점차 더 과격하게 연주하게 된다는 점이에요. 마이크로폰이 인간의 귀보다 성능이 나쁘기 때문이죠. 어, 정말이에요! 그래서 표현을 과장해야 간신히 잡혀요.
-문외한이 보기엔 시인, 소설가, 화가와 달리 음악가는 규칙적인 연습과 매우 단조로운 생활로만 성취를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연주만 한다면 언제 성숙한 예술을 위한 ‘삶’이라는 걸 살아갈 수 있을까, 통찰과 경험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동시에 들거든요. =왜요. 화가도 소설가도 모두 일정량의 시간을 투자하죠. 다만 음악은 전시되는 시간 안에 완성을 보아야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림은 그릴 때나 보는 데에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잖아요. 3년이나 5년 걸려 그려놓으면 50년이 흘러도 같은 그림이지만, 음악 연주는 끊임없이 반복해야 해요. 음악은 그러니까 시간을 조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경험을 말하셨지만 저희에겐 음악이 곧 삶이에요. <비창교향곡>을 한번 연주하면 제가 아는 평균치 삶에서 느끼는 애절함보다 천만배 감정을 느끼고, 그걸 남한테 전달까지 해야 하니 표출도 강하게 해야죠. 연주자 입장에서 그것은 결코 독서 같은 ‘간접경험’이 아니라는 거예요. 40분 동안 <비창>을 연주하면 40분 동안 <비창>을 사는 거예요.
-파블로 카잘스 전기에서 이런 일화를 읽었어요. 카잘스가 미국 연주여행 중 바위에 왼손을 맞아 손이 박살났대요. 그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난리가 났는데 정작 본인의 첫 번째 생각은 ‘아이고 다행이다. 이제 다신 첼로를 켜지 않아도 되겠구나’였대요. 그걸 읽고 연주가란 일종의 노예이기도 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반년 쉬면 일년은 과속해야 따라갈 수 있는 게 모든 시장 논리이기도 하고요. 말이 좋아 첼로의 요정이지, 첼로의 노예라고 할 수 있지도 않을까…. =아하하 요정은 무슨 요정! 정말 누가 그 말을 만들었는지 몰라. 쉬고 싶은 생각이 들면 실천해야죠. 큰병 나요. 아빠가 저보다 훨씬 민감하셔서 15년 연주했으면 쉴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하시더라고요. 누굴 따라가야 하고 누구보다 바빠야 한다는 압박감은 없어요. 그런 건 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망상증 아닌 망상증이죠. 무엇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어렵게 준비해서 마침내 제대로 음악을 만들 때의 환희가 한나씨가 계속 음악을 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반면 쉽게 간다면 거기가 지옥이라고도 했고요. 공짜는 없다, 어려움만이 행복을 담보한다는 믿음인가요? =경험해서 아는 건데 진짜 공짜는 없어요. 악보는 연구하면 할수록 어려워져요. 혹 쉽게 풀리면 무대 위에서 어려워져요. 알면 알수록 어렵기 때문에 준비를 많이 해서 나쁠 게 없어요. 뭔가를 알았을 때 멈추지 않고 더 열심히 하면 다른 게 또 보이거든요. 사람이란 동물이 그래요. 생각하면 할수록 새로운 문제점이 보이는 거죠. 예를 들어 <전원교향곡>도 연구할수록 문제점이 보이고, 그 문제점을 어떻게 하면 가장 황홀한 순간으로 변화시킬까를 고민해요. 그때 변화의 계기는 해석에서 나오니까 시간을 들여 해석을 도출하죠. 여기는 작게, 여기는 크게 하자고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엄연히 존재하는 틀과 악보, 작곡가 사이에서 고민하고 연구해야 해요. 특히 지휘자는 그래야만 단원에게 해석의 당위를 설명할 수 있잖아요.
-엉뚱한 질문인데, 자기 안에 온기가 있다고 느끼세요? =아니요. (당황하는 기자) 우하하하. 온기는 없고요. 불이 있어요, 불이!
追伸 장한나를 만나기 열여덟 시간 전. 헐레벌떡 뛰어오른 퇴근길 지하철 칸에서, 우두커니 선 청록색 첼로 케이스에 코를 부딪힐 뻔했다. 맙소사! 이것이 21세기에도 미신이 건재한 이유야! 짐짓 첼로 임자인 소녀가 앉은 좌석 앞에 섰다. 그녀의 신경은 열차 문이 열릴 때마다 화드득 깨어나 온통 첼로의 안위에 쏠렸다. 이윽고 편히 졸기를 포기한 그녀는 MP3를 귀에 꽂고, 고교 입시용 학습지를 꺼내 들었다. 소녀의 왼손은 노트 위에서 보이지 않는 네줄의 현을 누르며 춤추었다. 현악기 주자들이 그렇듯 소녀의 굳은살 박힌 왼손 끄트머리는 개구리의 그것처럼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민주사회의 기본 이념”과 운지법 사이에서 번민하던 소녀는 펜을 놓았다. 그리고 척 보기에도 짝짝이인 양손을 들어 한 마디 한 마디씩 포갰다. 짧은 오른손과 긴 왼손의 차이. 1cm도 안 되는 그 허공이 해독할 암호라도 되는 듯 소녀는 골똘히 시선을 못박았다. 그리고 양손을 책장처럼 펼쳐 물끄러미 읽더니 털썩 무릎에 내렸다. 들릴 듯 말 듯 한숨이 새나왔다. 스무 시간 뒤 장한나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나는 전날의 여학생이 뜬금없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무슨 곡을 듣고 있었나요? 몇 시간 연습하면 안심하나요? 첼로를 미워한 적 있나요? 오직 그녀만이 내 미진한 인터뷰를 완성시켜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