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기간 동안 진보신당의 임시 당직자가 되어야 했던 어느 분의 얘기다. “할머니와 통화를 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절대로 그 당에 얽혀들지 마라. 그 당에는 희망이 없어요, 희망이. 할머니 말 허투루 듣지 말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분은 정규직 회사원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다. 무급으로 일하는 동안 손해가 없진 않겠지만, 잠깐 선거운동에 참여했다고 미래에 일감이 줄어들 상황도 아니다. 그런데도 ‘희망이 없는 당’에 얽혀들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희망이 없는 당에 얽혀들면, 내 인생도 희망이 없어지나?
시절이 좋아져서 무슨 운동에 잘못 참여한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갈 상황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운동을 두려워한다. 하긴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될 사람’을 찍는 쪽이 마음에 편하다는 사람도 많은 나라이니 오죽할까. 다양성에 대한 정치적인 억압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문화적인 억압은 여전하다. 문제는 실제로 정치적 탄압을 경험한 기성세대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서도 이러한 억압의 기제가 강고하다는 데 있다. 언제나 우리가 희망의 근거를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운 ‘다음 세대’로부터 찾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물론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도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생각할 만한 환경에 처해 있으니까. 온 가족이 힘을 합쳐 아이를 지원해주는 무한경쟁의 청소년기를 거친 뒤, ‘좋은 시절’과는 거리가 먼 대학으로 들어온다. 학점에 토익에 기업의 인턴 경험까지 관리해도 취직이 안 되는 이들에게 대학 생활은 그저 고통스러웠던 고등학교 시절의 연장일 뿐이다. 남들 사는 것처럼 안 살면 곧바로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토익책을 덮고 짱돌을 던져라”고 주문하기엔 무리가 있다. 영어가 필요없는 직장에서도 토익점수 900을 요구하는 한국사회에서 토익책을 덮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한경쟁 속에서 연대성을 체험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짱돌을 들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은 짱돌이 무엇인지는 알까. 혼자서 우두커니 골목길에서 짱돌을 던질 수도 없는데.
하지만 토익책을 덮지 않고도 정치적 행동은 할 수 있다. 아무리 인생이 팍팍해도 여가시간을 전혀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일 여가시간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그에게 정치적 행동을 권유하겠는가). 드라마도 보고, 애니메이션도 보고, 만화책도 본다. 약간의 정치적 관심을 가지고, 어떤 활동의 지지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 리 없다.
당연히 비용이 조금은 든다. 나는 진보신당에 입당하면서 매달 당비 1만원과 비정규직 연대기금 1만원을 내기로 했고, 창당특별기금 10만원을 별도로 냈다. 창당특별기금은 선택 사항이라 하여 친구들에게 입당을 권유할 때는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국고보조금도 전혀 받지 못하는 이 신생정당이 자금이 풍족할 리가 없는지라 중앙당에서도 지역구 선본에서도 특별당비를 부탁하는 연락이 왔지만, 차마 그것까지 내지는 못했다. 시간과 체력이 허용하는 만큼의 미약한 자원봉사를 했고,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당투표 지지 부탁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은 이만큼 하지 않아도 가능한 것이 정당 참여다.
요즈음에 ‘먹히는’ 언어로 바꾸어보자면, 운동은 재테크처럼 생각해도 된다. 원금 보전을 하기 힘들 만큼 리스크가 크지만, 잘될 경우 많은 것을 바꾸어낼 수 있는 그런 재테크 말이다. 다른 투자가 그렇듯 운동에도 장기투자가 필요하다. 미국 주식의 역사를 보면 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으로 주식이 오른다. 점쟁이가 아닌 이상 그 기간을 알 수 없으니, 확률적으로 볼 때 그 기간에 주식을 보유하여 이득을 챙긴 사람은 장기투자자들뿐이었다고 한다. 운동 역시 그렇다. 대개의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한 운동에 힘을 빼고 환멸을 느끼며 그만둬버린다면, 단타매매에 올인했다가 손을 털고 사라지는 어리석은 개미투자자들과 비슷한 꼴이 되는 것이다.
운동이 망하면 참여자도 망해야 한다고 믿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순혈주의 운동권들이고, 다른 하나는 냉소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운동이 망했는데도 참여자들이 살아남아 다른 운동으로 갈아타는 꼴을 보기 싫어한다. 제 살 궁리 찾아가면서 적당히 운동에 힘을 보태는 것은 모순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모순적인(?) 행위의 결집 속에서만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운동 망해도, 나 안 망한다. 그런데 뭐가 두렵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