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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베껴야 산다?
이영진 2008-04-17

1960년대 충무로에서 만연했던 일본 원작 표절

“다음 A, B항 중에서 서로 관계가 있는 것끼리 번호를 묶으시오.” A-①불한당 ②남자조종법 ③5인의 해병 ④이 세상 어딘가에 ⑤마음대로 사랑하고 ⑥급행열차를 타라 ⑦3등과장 ⑧조춘 ⑨주유천하 ⑩5색 무지개 B-①이 하늘가에 ②숨은 성새(城塞)의 3악인 ③용심봉 ④천국과 지옥 ⑤이름도 없이 아름답고 가난하고 ⑥5인의 저격병 ⑦조춘 ⑧가정의 사정 ⑨남자사육법 ⑩수호황문만유기

1963년 5월24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표절 관련 기사의 첫머리다. 일본 원작을 무단으로 베끼는 것이 일부 몰지각한 제작자들의 행태만은 아니었나보다. ‘쉬운 퀴즈 문제’라는 덧말까지 붙여서 비꼬았다. 누가 누구를 욕하랴.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까지 일본 원작을 밀수해 제 것처럼 내놓았다. 일본 원작 불법 밀수는 한해 200여편의 영화가 쏟아지던 1960년대 충무로의 엄연한, 그리고 편리한 유행이었다. 시나리오작가인 최금동이 쓴 1962년 1월19일 <한국일보>에 ‘표절작가를 고발하라’라는 기고문을 보자. “일부 작가의 요술에 의하여 일주일 내외에 나까무라가 이서방이 되고 게다짝이 고무신이 되고… (중략) 다꾸앙이 깍두기가 되어 나오는 판이다… (중략)… 무엇보다도 화급한 것은 한국 영화계에서 도둑을 몰아내는 일이다. 도둑맞은 작가의 양식을 도로 찾는 일이다.” 영화평론가인 김종원 또한 영화인들이 “밀수선의 갑판 위에서” 관객을 눈속임할 “리스트만을 주판 놓기에 바쁘다”며 “도대체 작가정신은 호텔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었단 말인가”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도둑질 운운하는 비난이 제작자들에겐 괜한 허영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표절이라고 손가락질하면 “번안이라고 얼버무리면 될 일”이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남겠다고 자청하는 이도 많지 않았다. 너도나도 일본 소설 영화화에 나섰고, 이 때문에 충무로는 장물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1963년 상반기에 제작된 신필름의 <아버지 결혼하세요>와 동아흥업의 <5색 무지개>는 애초 일본 소설 <가정의 사정>이 원작. 그러나 제작진은 그 사실을 숨기고, 두 영화 모두 “오리지널이라는 복면을 쓰고서” 동시에 경작(競作)을 벌였다. 갈등은 두 영화의 개봉 전후로 불거졌다. 먼저 제작 신고를 한 <5색 무지개>와 내용이 같다는 이유로 <아버지 결혼하세요>가 공보부로부터 반려되자 신필름은 뒤늦게 아세아영화제에서 원작자의 승낙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사진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동아흥업쪽은 “원작자의 승인을 받은 것이 무슨 대수냐”고 받아쳤고 개봉을 강행했다. 신필름 또한 한점 부끄럼이 없는 건 아니었다. 김대의 각본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원작이 있음을 밝힌 뒤로 김지헌 각색으로 순식간에 크레딧을 바꿔쳤다. 앙숙이 된 2편의 영화에 딸들의 애인 역으로 나란히 동시 출연한 배우들까지 있었으니, 원.

칼자루를 쥔 공보부라고 솔로몬의 묘책이 있을 리 없었다. 표절작을 골라내서 엄단했다가는 “남아날” 영화가 많지 않았다. 사회적인 지탄을 피하기 위해 충무로가 발명한(?) 지능적인 표절 방식도 공보부를 곤란케 했다. 이른바 ‘스카치테이프식 시나리오 작법’. “한 작품만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 저 작품에서 부분적으로 찢어내서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나가면 한개의 훌륭한 시나리오가 탄생한다. 모 유력 영화사의 캐비닛 속에는 모 국의 대본의 가득 차 있다.” 편식하다간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것이 뻔하니 골고루 영양소를 섭취해야 한다? 혼식 표절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불법 일식(日式) 시나리오들은 1960년대 중반 한·일협정 체결을 전후로 맹위를 떨쳤다. 1965년 <경향신문>에 실린 한 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반 동안) 일본영화 표절작품이 족히 70∼80여편”에 달했다. 이 와중에 한·일 합작영화 계획들도 상당수 양산됐는데, <총독의 딸>의 경우 공보부의 허락을 받지 못하자 관광편으로 한국에 들어온 일본 여배우 미치 가나코를 비밀리에 출연시키는 집념의 작전까지 선보였다. 과거지사, 왜색 운운하며 민족적 단죄를 운운하는 건 오버다. 다만 이건 어떤가. 자력갱생하겠다며 1962년 무리한 화폐개혁까지 감행했으나 결국 미국으로부터 원조 중단 협박을 받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국 “수출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쳤던 박정희 정권. 그러나 정작 세계시장에 내놓을 물건은 없었고, 군사정권은 결국 차관을 통한 증산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델은 한참 앞서 있는 일본이었다. 1962년 9회 아세아영화제를 처음으로 개최하면서 해외영화 시장에 막 눈을 뜬 충무로 또한 마찬가지 딜레마에 처했다. 홍콩, 필리핀 등과 합작을 논의하며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 도약은 미미했고, 외려 잠깐의 개방은 일류(日流), 그것도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역류를 맞았다. 일본영화, 소설을 무단으로 도용해 표절하고서도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던 1960년대 충무로. 같은 시기 건설자재로 속여 밀반입한 사카린을 대량으로 국내 판매하려고 했던 삼성과 이들을 감쌌던 군사정권. 뭔가 닮은 점이 보이지 않나.

참고자료: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 <한국현대사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