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영예의 주인공은 ‘윌슨’이었다. 오언 윌슨 말고 <캐스트 어웨이>의 배구공 말이다. 값싼 PPL이라는 비난에 맞서 위대한 침묵 연기로 전세계 외로니스트들의 ‘애완볼’이 된 윌슨. 그러나 윌슨은 생전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스튜디오 컷은 아니더라도 변변한 스틸조차 남아 있지 않다니. 아쉬워할 여유도 없었다. 마감은 코앞. 윌슨에 필적할 만한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배우들의 면면에는 까막눈인 터라 싱싱한 리스트를 내뱉을 능력이 없음을 한탄하던 중 며칠 전 구입해 침만 묻혀둔 <카불의 사진사>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프가니스탄이라, 마리나 골바하리는 그렇게 뜬금없이 떠올랐다. 마리나 골바하리는 2년 전 국내 개봉한 <천상의 소녀>(2003)에서 오사마 역을 맡은 배우다. 캐스팅을 위해 카불 시내를 헤매다 세디그 바르막 감독의 눈에 띄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가끔 학교에 가는 거 말고는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던 소녀였다. 세디그 바르막에게도 마리나 골바하리는 손을 내밀었고, 감독은 동전을 던져주는 대신 그녀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그러나 소녀는 좀처럼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했다. 족쇄를 차는 장면에서는 겁에 질려 울었고, 리허설 때도 그녀는 폭격으로 죽은 언니를 떠올리며 울었다고 한다. “인도영화를 한편 본 것이 전부인” 소녀가 실제 본 시커먼 카메라는 탈레반의 무자비한 기관총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천상의 소녀>에서 부르카를 쓴 아프가니스탄의 흐느낌이 느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마리나 골바하리의 떨리는 동공 때문이다. 이후 한편의 장편과 단편영화에 출연했다는 마리나 골바하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배우가 되어 유명세를 탔으나 비가 새는 집에 살면서 하루 5달러로 한 가족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가난의 삶을 떨쳐버리진 못했을 것이다. 부산에 왔을 때 빛나는 녹색 민속의상을 입고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고개를 돌리며 눈을 찡긋거리던 마리나 골바하리. 쑥스러움이 무척 많다기에 인터뷰를 아예 청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슬픔으로 반짝이는 눈이라도 마음에 새겨뒀으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