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 소재한 시그마 필름과 덴마크의 젠트로파사는 ‘Advance Party’라는 이름으로 세편의 영화를 공동 기획했다(배후에는 라스 폰 트리에가 있었다). ‘도그마95’의 영향 아래 있는 세 영화에는 까다로운 조건들이 주어졌다. 세명의 감독이 동일한 캐릭터와 배우를 데리고 각자의 영화를 만드는데, 글래스고시를 배경으로 찍어야 하고, 영화의 길이도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데뷔전의 신인감독을 또 하나의 조건으로 내세운 제작진은 미국 아카데미에서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안드레아 아놀드를 그중 한명으로 선택했다. 마흔이 넘은 안드레아 아놀드는 그렇게 장편영화를 만들 기회를 잡았고,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면서 주목할 만한 감독으로 떠오른다(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도 <붉은 거리>가 상영된다). CCTV 오퍼레이터인 재키는 모니터를 통해 자기가 맡은 구역을 감시하고 관찰한다. 동료와 나누는 건조한 성관계처럼 쓸쓸한 삶을 살던 그녀는 어느 날 모니터에 잡힌 남자를 보고 놀란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불행과 어두움을 안겨준(사연은 영화의 끝부분에서 밝혀진다) 그를 모니터로 뒤쫓고, ‘레드 로드’에 있는 그의 집을 알아내고, 그와 대화를 나누고 성관계를 가진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 <붉은 거리>의 초반부에서는 미카엘 하네케의 영향이 느껴진다. 모니터와 비디오테이프로 보이는 황량한 도시의 외관은 고달픈 현실과 마음의 고통으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어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과정에선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 연상된다. 자기 존재를 가린 채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여자의 거친 호흡은 <아들>에서 아들을 잃은 남자가 소리없이 외치는 울부짖음과 한짝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그래서 감동이 더 큰 영화의 결말에는 안드레아 아놀드의 목소리가 온전히 담겨 있다. 캐릭터들이 이끄는 대로 세개의 각본을 써놓았던 아놀드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버전이 좋다는 프로젝트 참여자들의 의견에 따라 그것을 <붉은 거리>로 완성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결말이 암울한 건 아니다. 상처입은 사람들의 영화인 <붉은 거리>는 그들이 상처를 극복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영화다. 인간에게 구원은 버거워도 용서와 배려는 가능하다. 모니터 뒤에서 분노의 신으로 살던 여자는 모니터 밖으로 나가 인간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일상의 천사가 된다. 영화의 끝에 ‘허니루트’가 부른 ‘조이 디비전’의 명곡 <Love Will Tear Us Apart>가 나오는데, 흡사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처럼 들린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매 장면을 음성으로 설명하는 ‘비전 텍스트’ 기능을 갖춘 DVD는 감독과 배우 인터뷰(13분), 짧은 현장 영상(1분)을 부록으로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