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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심이 증오로 변하는 순간, <조용히 살고 싶다>

EBS 3월15일(토) 밤 11시20분

성공한 비즈니스맨인 루이지는 고향 해안마을을 방문하고 가까운 친척에게 닥친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된다.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아버지는 감옥살이 중인 로사리오를 만난 것. 루이지는 로사리오를 돕기 위해 그를 로렌조 신부가 운영하는 북쪽의 보호소로 보낸다. 자존심 세고 조용한 로사리오는 보호소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해가지만, 그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루이지는 자신의 아들 마테오를 소개해준다. 두 청년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지만,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점차 가까운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둘의 관계가 친밀해질수록 루이지는 로사리오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이 세운 울타리로부터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루이지의 이상한 이중성은 두 청년의 우정에 상처를 입힌다.

미모 칼로프레스티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이름이지만, 난니 모레티와 함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 토대를 둔 감독이다. 난니 모레티가 출연하고 제작한 데뷔작 <두 번째 시간>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바 있다.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자수성가한 상류층 남자의 이타심이 점차 변질되어가는 과정, 혹은 이타심의 본질을 고요하게 파고드는 영화다. 타자와 거리를 둘 때, 이 남자는 여유로운 자선사업가 같은 풍모를 지니지만, 그 타자가 일정한 거리를 깨고 삶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할 때, 남자는 자신의 존재가 위태로워짐을 느낀다. 다시 말해, 타자를 향한 이타심이 자신의 뿌리를 흔드는 결과로 돌아오자, 이타심은 금세 증오로 변한다. 타자에 대한 섣부르고 감상적인 연민과 타자에 대한 두려움, 나아가 배척은 결국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여기에는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한 상류층 가정의 침묵하는 균열, 비밀이 있고 가식적인 고상함과 그걸 감추려는 불안감이 편재해 있다. 이를 참지 못하는 아들 마테오가 우아한 집안 구석구석을 부수고 엎어버린 뒤 자신 역시 쓰러져버리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감정이 밖으로 분출되는 장면이다. 영화는 서정적이고 절제된 풍경 같은 화면과 음악을 통해 최대한 건조하게 이야기를 진행하며 속으로 삭여지는 인물들의 감정적 본질과 이들의 관계 밑바닥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을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