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이”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모르는 어떤 것들이 있다. 지금이야 공부를 아주 잘하지 못할 거면 차라리 튼튼한 것이, 어쭙잖은 학위보다는 언어나 기술 하나 더 배운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17살 때는 단순히 수학2와 한자 중에 뭐가 덜 괴로운가를 저울질해 ‘문과’를 선택했고, 스무살 무렵에는 이력서에 뭐라고 써야 취업이 잘될까를 ‘도토리 키 재기’를 해서 전공을 골랐다. 판단의 기준도 모호했지만 골똘히 고민하지도 않았다. 굳이 찾자면 모의고사 점수나 수능 백분위, 신뢰가 전혀 안 가는 IQ 테스트 결과, 이과 아니면 문과로 양분해주는 ‘흑백논리’의 적성검사로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을까? 그때그때 선택은 나의 몫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어김없이 돌아왔다.
바람이 잠시 멈춰 덜 춥다고 착각했던 일요일 오후, 삼청동 초입의 한 카페에 앉아 “그 나이”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M과 C와 담소를 나눴다. 당연한 수순도 밟지 않았는데 화제는 섹스로 향했다. 구체화하자면 연애와 섹스 중 뭐가 먼저냐 정도.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를 따지려는 건 아니었지만, 불과 몇년 전이었으면 펄쩍 뛰었을 다음 문장에 대해서 3인은 100%는 아니지만 동의는 했다. 진지한 남녀관계를 시작하기 전에 잠자리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속궁합이 맞지 않아) 결국은 헤어질 사람과의 관계에 소비하게 될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는 것이다. 결정을 위한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 정보 탐색 및 수집 과정으로 보는 것도 무방했다. 무책임한 듯 싱거운 3인의 동의에는 스스로가 결론없는 연애를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생각하는 정서의 공유도 주요했다. 설 연휴 3인이 겪었을 가족모임과 ‘결혼적령기’라는 상대적이어야 마땅한 기준도 이런 대화가 오가게 한 공범자 혐의를 벗기는 힘들겠다. 물론, 대다수가 그러하듯 3인도 머리와 가슴과의 거리가 먼 탓에 실천할 자신은 없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서점에서 오랜만에 영화와 관련없는 잡지를 골랐다. 인테리어, 요리 등에 대해서 민감하고 싶어하는 이 책은, 이른바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종합정보지다. 잡지의 지면광고는 타깃 독자층을 유추하는 타당한 근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캐릭터 책가방이나 앙증맞은 운동화 같은 취학아동을 위한 물건과 턱받이, 아동복 등이 펼쳐진 유아용품 광고가 유독 눈에 띄었다. ‘레이디’ 혹은 ‘여성’이라고 제호부터 독자를 지정한 주부생활지도 아니었고 학생 때도 즐겨보던 잡지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기혼자를 대상이라고 표방하지는 않았으나 광고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알아차리고 뜨끔한 건 내쪽이었다. 잡지에 대한 의혹보다 나에 대한 심증이 짙었다. 그릇이나 인테리어가 눈에 들면 결혼할 때라고 하는데 그릇은 예전부터 좋아했고 인테리어는 나만의 공간을 꿈꾼 뒤로 늘 관심의 대상이었으니 굳이 결혼과 묶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예전에도 존재했을 것인데 이제야 내 눈에 들어온 그 광고들에 대해서만큼은 가볍게 지나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최근 다투어 찾아온 청첩장들에 마음이 동했을 뿐이라고 다독이는 중인데, 혹시 “그 나이”가 되지 않고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 중에 싱숭생숭한 20대 후반 싱글을 위한 조언이 있으면 미리 좀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