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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박물관 전시품 기증 릴레이 26] <아리랑> 신문광고

<씨네21>은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오는 5월 영상자료원 내에 문을 열 한국영화박물관을 위한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며 전시품 기증 캠페인을 벌입니다. 26번째는 김종원 영화평론가가 기증한 <아리랑> 신문광고입니다.

1926년 9월 무성영화 전성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전대미문의 걸작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한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씨가 기증한 1926년 10월 1일자 <조선일보>의 <아리랑> 광고는 영화가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서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현대 비극 웅대한 규모! 대담한 촬영술! 조선 영화사상의 신기록! 당당봉절(堂堂封切)! 촬영 삼개월간! 제작비용 일만오천원 돌파!’라는 광고카피는 <아리랑>이 제작 규모와 영화기술 면에서도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800여명의 엑스트라가 출연했다고 한다.

‘눈물의 아리랑/ 우슴의 아리랑/ 막걸니 아리랑/ 북구(北丘)의 아리랑/ 춤추며 아리랑/ 보내며 아리랑/ 떠나며 아리랑’이라는 다분히 시적인 홍보문구에서는 민족적 정서가 짙게 배어나온다. 두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던 나운규의 연출 데뷔작 <아리랑>은 최초로 민족의 현실을 드러낸 리얼리즘 민족영화라 할 수 있다. 3일 뒤에 실린 <매일신보>의 광고에서는 검열로 삭제된 ‘… 문전의 옥답은 어듸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라는 노골적인 문구가 보여주듯 <아리랑>은 당시 억압된 민족감정에 불을 지피고자 했다. 나운규는 일본 제작사와 스모리 히데카쓰라는 일본인 감독의 명의를 앞세우고 영화적으로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항일적인 색채를 우회적으로 표현해 검열의 제재를 피해갔다. 당시 자조적이고 신파조의 예술경향이 만연한 상황에서 <아리랑>은 커다란 충격이자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경손 감독은 <아리랑>에 대해 “구극(舊劇)의 구조를 탈피한 이 작품은 마치 어느 의열(義烈) 단원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레임을 느끼게 했다”고 회고한다.

<아리랑>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개봉 전날 전단지의 내용 중 검열로 삭제된 주제곡 부분이 뚫린 채로 뿌려졌다는 소문은 오히려 기폭제가 되어 단성사의 문짝이 부서질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영화관 앞에 처음으로 기마 순사가 동원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흥행이었고 이후로도 수십년간 <아리랑>은 전국을 순회하며 상영되었다. 김유영의 표현처럼 ‘관중의 가슴에 폭풍우와 같은 고동과 감동을 준 명작’ <아리랑>은 아쉽게도 지금 볼 수 없게 됐지만 이 같은 사료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김종원씨의 기증품은 오는 5월 개관할 한국영화박물관 ‘나운규와 나운규프로덕션’ 섹션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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