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오픈칼럼
[오픈칼럼] 라오스의 리듬에 몸을 맡기다
최하나 2008-02-29

캄보디아 사람들은 벼를 심고, 베트남 사람들은 벼를 수확하며, 라오스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 문장 하나가 심장에 꽂혀버렸다. 그래서 가방을 쌌다. 2008년 구정 합본호를 업고 찾아온 첫 휴가의 행선지는 참으로 단순하고도 막연한 동기로 결정됐다. 물론 달뜬 얼굴로 더듬더듬 “그러니까, … 벼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대” 말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은 대체로 ‘그래서 어쩌라고’에 가까웠지만. 라오스 땅에 떨리는 첫발을 딛는 순간, 비엔티엔 공항은 국수 가락처럼 늘어진 줄로 응답했다. 여행자들에게 도착 비자를 발급해주는 직원은 단 한 사람. 넉넉한 인상의 그분은 매우 여유롭게 일을 처리했고, 한국이었다면 계란 투척이 이루어졌을 속도로 간신히 입국 수속을 마쳤다. 수도임에도 시내에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신호등 색깔이 바뀌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중 다수의 신호등이 수동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도로변 한 지점에 담당자가 상주하면서 행인이 나타나면 버튼을 눌러주는 것인데, 문제는 그가 종종 길 안내나 지인들과의 환담에 몰두해 신호등을 깜빡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요히 눈치를 보며 무단횡단하는 법을 익혔다. 도보 여행은 섭섭할 만큼 자유로웠다. 발을 제대로 한번 떼보기도 전에 귀가 떨어져라 “뚝뚝!”을 외치며 앞길을 가로막는 방콕과 달리 라오스의 뚝뚝 기사들은 참으로 무심했다. 옷깃을 붙잡지 않는 것에 되레 어색해하던 나는 슬금슬금 이곳의 리듬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라오스 수도에서 버스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방비엔은 심장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절경을 자랑하는 도시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선 여행자들이 풍경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매우 색다른 스포츠다. 이름하여 ‘튜빙’(Tubing). 이 새로운 스포츠를 즐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시원하게 뻗은 강 위에 튜브를 띄운다. 올라타서 눕는다. 그리고…? 떠내려간다. 튜빙으로 강을 타고 내려오다 보면 양편으로 선 작은 오두막들이 보인다. 물놀이에 지쳤을 때 맥주를 홀짝이며 다른 선수들의 튜빙 자세를 품평할 수 있는 일종의 선착장들이다. 튜브에 올라타자마자 안절부절 손바닥을 퍼덕이며 저어대던 나는 곧 힘을 빼고 강의 흐름에 몸을 기탁하는 것이 이 스포츠의 룰임을 깨달았다. 정말이지 미안할 정도로, 할 일이 없었다. 태양은 따가웠으며, 하늘은 푸르렀고, 강물은 투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냥 그렇게.

얼마 전 K선배가 주간지 인생의 매력을 요목조목 짚어주셨으니, 이번에는 비애를 하나 언급하련다. 수면박탈과 스트레스야 모든 직장인들에게 공통사항이겠으나, 주간지 기자들은 대체로 일주일에 맞춘 바이오리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월요일에서 출발해 점차 하강 곡선을 그리다가 수요일에 바닥을 치고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식인데, 때로는 특정 요일에 따라 내가 느끼는 감정까지 자동화돼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여행이란 것은 아주 잠깐이라도 상자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그래서 그 리듬을 부숴볼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종종 무엇을 봐야 하고 무엇을 먹어야 하며 무엇을 사야 한다는, 여행자의 강박들은 또 다른 상자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어버리는 것 같다. 최소한의 의무도 강박도 없는 방만하고 나태하며 안일한 여행. 라오스의 공기는 그러한 여행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항로를 열어줬다. 벼가 자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나, 내 근육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태엽이 풀리는 소리는 들었다. 단, 그것이 향후의 마감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