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카리 신지의 성장담을 스크린에 펼쳐낸 쓰루마키 가즈야 감독으로부터 서면 인터뷰가 도착했다. 쓰루마키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시작으로 TV판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부감독을 맡으며 가이낙스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애니메이터 출신 감독이다. 안노 히데아키 총감독에 관한 질문에는 “나만이 언급하기는 힘들고, 총감독의 의향이 따로 있으니 답변은 못 드린다”며 미안함을 전했다(솔직히 거기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쓰루마키가 말하는 새로운 <에반게리온>의 시작.
-당신도 안노 히데아키처럼 10년 전 극장판의 결말에 동의하지 않았던 건가. =당시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개인적으로는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일반적인 영화 장르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일종의 영상 작품으로서 현재도 최고봉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이카리 신지는 TV시리즈보다 덜 정신병적인 인물이 됐다. 미사토의 대사 “전 일본의 마음을 담아…”도 조금 낯설다. 당신들이 10년 전보다 나이가 들었다는 방증일까. =사실상 10년 전은 10년 전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작품을 본 사람들이 ‘연륜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느꼈다면 그 또한 대단히 기쁜 일이다.
-예전 작화와 새롭게 그려진 작화의 격차가 <제타건담>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두 작화 퀄리티의 격차를 줄일 수 있었나. =일부 레이아웃 및 원작을 그대로 쓴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 이후의 공정은 모조리 디지털로 다시 만들었기 때문에 새로운 장면과의 차이가 없어진 거다.
-초호기의 색깔이 달라졌다. 특히 눈부시게 빛나는 형광색이 돋보이는데 왜 이렇게 설정했나. =애초부터 야간장면에서는 초호기가 그렇게 보이게끔 하고 싶었다. 그러나 TV판 제작 당시에는 기술적인 이유로 구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디지털 촬영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오늘날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비용과 시간만 충분하다면 화려하고 복잡한 화면이나 촬영기술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기술에 휩쓸리지 않고 원래 에바의 연출 스타일인 ‘스토익’(Stoic)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많은 상영관에서 개봉한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본 흥행성적이 매우 좋았다. =극장을 찾아준 관객 중에는 10년 전의 붐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분들이 신극장판을 10년 전의 팬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들을 위한 에반게리온’이라고 여겨줬기 때문이 아닐까.
-시리즈가 처음 방영됐던 90년대와 지금 2007년의 정서는 매우 다르다. 새로운 세대의 정서를 뭐라고 생각하나. =물론 기술의 진보나 세계 정세의 변화로 인해 사회도 크게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만, 젊은 세대를 각각의 개인이라는 단위에서 바라볼 때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지 않을까.
-<에반게리온>의 방영 이후 ‘포스트(Post)-에바’라고 불릴 만한 작품들이 꽤 나왔다. 이를테면 도미노 요시유키의 <브레인 파워드>를 비롯해 <라제폰>(ラゼフォン) 등등. 이 작품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개인적으로 그 모든 작품을 팬으로서 즐겁게 감상했다. 제작자가 ‘에바’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의 ‘로봇애니메이션=장난감, 프라모델 광고’라는 굴레가 사라지고 작품 자체로서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끔 된 거라고 생각한다.
-‘카라’와 ‘가이낙스’는 당분간 에바에 매달릴 예정인가. =신극장판은 4부작이기 때문에 카라는 당분간 <에반게리온>에 집중하게 될 거다. 가이낙스는 신극장판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신작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TV판에서는 잠시 등장했던 카오루가 이번 작품부터 전격 등장한다. =TV시리즈에서 카오루는 1회에 한정된, 말하자면 게스트 정도였다. 그러나 10년 전의 영화를 통해서, 카오루는 스토리에서나 신지에게나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커다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신극장판에서는 초반부터 이야기에 등장시킨 거다. 구체적인 것은 다음 영화를 통해 확인하면 될 거다.
-당신들의 ‘서비스! 서비스!’ 정신의 본질은 뭔가. =관객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