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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패션지에 대한 단상
장미 2008-02-01

패션지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유명 포토그래퍼들이 찍은 사진도 잔뜩 볼 수 있고,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내 마음을 매료시키는 촌철살인의 에세이도 읽을 수 있다. 가난한 지갑 사정에 엄두도 못 내는 명품들을 넋놓고 감상하거나 일생에 단 한번도 가지 않을 값비싼 레스토랑, 카페, 바 등을 엿보거나 요즘 화제 만발이라는 문화 상품을 소개받으면서 나 역시 유행을 선두하는 현대 여성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모 잡지에서 특화한, 여성을 위한 섹스 칼럼도 실용성은 없을 것 같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 백과사전만한 두께라니! 광고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긴 해도 슬렁슬렁 페이지를 넘기다가 던져두고 생각날 때 다시 펼쳐들어 정독할 수도 있으니, 시간 때우기용으로 아주 좋다. 범인의 예술 감각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만 차치하면 사진으로 꽉 찬 지면 구성은 편지지로 재활용하기에도 적격이다.

“싹 쓸어서 갖다버리겠다”는 남편의 협박에도 거실 한구석에 바*, 보*, 에스콰** 등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을 정도로 나름 애독자를 자처하고 있지만 근래 패션지를 읽으면서 짜증이 치미는 이유 중 하나. 도대체가 한번에 머리로 쏙 들어오는 문장이 없다는 것. 웨어러블한 아이템, 글래머러스, 패셔너블, 잇백, 커리어우먼, 퍼스널 트레이너, 시크, 어드바이스, 럭셔리, 네이키드 맨 등의 단어가 잔뜩 들어찼으니 그럴 수밖에. 낱낱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외국어임이 분명한 그 단어들을 보면 미간에 주름이 절로 잡힌다.

아니, 내가 진정한 ‘패션 피플’이 아니라서 ‘쿨한 애티튜드’, ‘시크하면서도 웨어러블한 드레스’, ‘섹시한 보디’ 등이 함축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긴 금요일 저녁에 온스타일이나 동아TV를 시청하는 것 외엔 ‘하이 패션’의 세계를 접할 길이라곤 요원한 나 같은 사람이, ‘드레스 코드’가 지정된 파티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이들의 세계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겠는가. 하지만 진짜 멋진 사람이라면 ‘패셔너블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도 그 단어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우아하게 연출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아쉬움. 물론 나 역시 패션이라는 말이 동반하는 묘한 두근거림을 좋아하고, 모델들의 도도한 자세와 걸음걸이를 선망하고, 국어보다 영어나 불어 같은 외국어가 더 세련되게 들린다는 불순한 편견에 꽤 자주 휘말리곤 한다. 한국어에선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영어 단어를 굳이 순우리말로 만들어서 쓰자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크랭크인, 크랭크업 대신 촬영 시작, 촬영 종료라고 쓰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그나마 조금 나은 처지라고 소심하게 믿고 싶을 뿐.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얼마 전 편집의 세계에 입문하면서 타인의 글을 수백번 고쳐읽기 시작한 초짜 편집기자의 비애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단어가 갑자기 생소해 보이고, 이 글엔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고심하면서 온갖 잡다한 표현들을 떠올렸다 폐기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면 단순히, 마감에 쫓겨 뒤엉킨 사고 체계 때문일까. 지난주 “이제부터 라인업이라는 말은 안 쓰기로 했어”라는 편집부 선배의 말을 듣고, 교정지에서 라인업이라는 단어를 박박 지우면서 문득 든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