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아니다. 아직은 언니들처럼 유명하지도 않고 그들보다 더 잘한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독특한 제 멋을 결코 숨기지 못한다. “옆모습이 김희선을 닮았어요”(사진기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허리를 90도로 꺾어 웃으며 “제가 가끔 옆으로 보면 다른 사람처럼 보여요”라며 반은 어이없다는 듯 반은 너무 고맙다는 듯 웃을 때 보면 여배우치고 소탈하다. 유연한 농담 실력은 물론 수준급이지만 인터뷰 도중 들락거리는 누군가에게 신경 쓰이니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눈빛으로 “이거 제가 알아서 할게요” 말할 때 보면 서늘한 강단도 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조은지가 맡은 역할은 국가대표 핸드볼 골키퍼 수희다. 위로는 아줌마 언니들을 두고 밑으로는 새카만 후배를 둔, 실력은 좀 떨어져도 희소성 때문에 겨우 버티는, 실력보다 국가대표급 깡다구로 살아가는 선수다. “공 던지다가 손 접질린 소리 언니도 있는데”라며 끝끝내 아니라고는 하지만, 골키퍼였던 탓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가장 많이 얻어터졌을 역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 말대로 “몸땡이” 좀 아픈 게 뭐 그리 대수였을까. 자기가 연기한 실제 선수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여우면서도 자랑스러워 한다. 함께 연기한 소리, 정은, 지영 언니들을 생각할 때마다 애틋한가보다. 수다를 떨어보니 확실히 그렇다.
-핸드볼 골키퍼 역할을 맡은 것치고는 실제로 보니 몸이 너무 여린 것 같다. =여린 걸로야 언니들이 훨씬 그렇지. 나야 뭐 그나마 체격이라도 있지만 언니들은 훨씬 더 말랐으니까.
-훈련을 호되게 했다던데. =매일 10시간 이상 뛰었다. 잠자고 일어나서 뛰고, 밥 먹고 일어나서 또 뛰고. 거의 체육관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육 키우는 걸 많이 했다. 점심 먹으면 바로 체육관 가서 기초체력 다지는 훈련하고. 진짜 선수들이 하는 것처럼 매일 그렇게 기초체력 훈련을 했는데, 진짜 토할 때까지 했다. 그리고 저녁 먹으면 코트로 가서 실제 경기연습하고. 내 경우에는 공 막기 연습. 그렇게 하루에 10시간을 3개월 정도 했다.
-힘들었겠다. 영화에 선수들이 얼싸안고 우는 장면 나오지 않나. 그런데 한편으로는 출연배우들이 영화 처음 보고 나서 서로 눈물 글썽이며 우는 장면도 상상되더라. 본인은 어땠나. =완성하고 나서 기술시사회장에서 영화 보다가 촬영 당시 힘들었던 것들이 자꾸 눈에 밟혀서 많이 울었다. 관객은 흐름상 엔딩장면에서 슬픔을 많이 느낄 거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그 장면을 얼마나 힘들게 찍었는지를 다 알고 있으니까 더 그랬을 수도 있다. 확실히 엔딩장면이 가장 힘들었다. 덴마크쪽은 진짜 선수들이라 우리도 선수들처럼 보여야 했고.
-공이 무섭지는 않던가. =배우니까 살살 던져준다고 하기에 처음에는 그냥 던져라, 악으로 하겠다, 뭐 그렇게 말했는데 나중에 하다보니 너무 아파서, 하하. 아~ 조금만 살살… 조금만 살살… 이라는 말이 그냥 나오더라. 약속을 하면서 던지는 건데도 무섭긴 하더라. 꼭 약속한 대로 들어온다는 법이 없으니까.
-승부 던지기 할 때인가, 오른쪽 허벅지로 막아내는 장면이 있지 않나. 저거 무지 아프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던데. =뭐 그런 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쌍코피 흘려봤고, 공에 맞아서 목젖도 들어갔다 나와봤다. 목젖이 쑥 들어갔다 나오는 게 느껴지더라니까. 쌍코피 흘릴 때는 이거 메이킹으로 찍혀야 한다며 다들 비키라고 소리도 질렀고. 하하, 언니들 볼은 사실 처음에는 다 보이더라, 음 이리로 오는구나. 그런데 동생들 볼은 안 보이더라. 확실히 테스트하고 뽑힌 배우들이라서. 처음에 공 맞으면 그냥 욱 하는 성질부터 났는데 나중에는 “어이,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지 맙시다” 이렇게 말하게 되더라. 실은 막으면 멋있기나 하지. 못 막고 골인되는 게 더 문제다. 몸이 먼저 가 있거나, 타이밍이 늦거나 하는 경우들이 있으니까. 몸땡이 좀 아픈 건 아무것도 아니지.
-본인 연기 중 어떤 장면이 마음 깊이 남아 있나. =당연히 승부 던지기. 골키퍼에 정말 가까운 심정이었다.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육체적이 아니라 심적으로. =그 장면(엔딩) 촬영 들어가기 전에 울었다니까. 글쎄 자료 화면을 덴마크 선수들하고 같이 보지 않았나. 그때 실제 경기 녹화한 걸 보여주면서 감독님이 덴마크 선수들에게 이렇게저렇게 던지라고 말하는데, 그때마다 선수들이 우~와, 예∼에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더라. 그 소리를 들으니까 얼마나 복받치던지. 다 정해진 걸 하는 건데도 마음으로는 잘해서 막고 싶더라. 슛 들어가기 직전부터 눈물이 자꾸 나는 거다. 언니들이 “수희야(조은지의 극중 이름) 지금은 우는 장면 아니야, 울지마, 울지마” 하는데도 계속. 다 정해진 연기인데도 (골키퍼로서) 아 막고 싶다, 막고 싶다 하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
-처음에는 자신보다 훨씬 많은 나이인 32살, 게다가 건장한 체격의 골키퍼 역할이라는 점에 다소 당황했다던데 언제부터 수희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왔나. =훈련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보기와 달리 내가 예의가 무척 바르다(자세를 고쳐 앉으며). 처음에는 김 선배님, 문 선배님 이랬다. 그런데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되겠더라. 그래서 (극중 캐릭터처럼 선배들을) “막 대해도 되겠냐”고 허락을 맡았다. 그렇게 바로 적응되니까 재밌더라. “어이~ 언니들 오늘 술 한잔 해야죠” 이렇게. “영화 끝나면 예전 조은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아직 못 돌아오고 있다. 언니들이 “너 나한테 너무 들이대는 거 아니냐”고 하면 “아, 왜 이래요. 다 아는 사이에” 이런다니까. 이 영화 끝나고 나니까 내가 아주 담이 커졌다. 나이가 일곱살 차이나 나는데도 만나면 어깨동무도 한다.
-이 영화 전에 안 그랬던 게 맞긴 한가. =정말이라니까. 선배들이 “너무 그러지 마라(너무 깍듯하게 행동하지 마라)”고 할 정도였다. 그동안 선생님들과 작품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동생들도 있고 언니들도 있어서 그런 게 가능했나보다. 몸을 버릴 줄 아는 배우들이 모여서 열심히 하는 걸 보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서로 살찌게 하려고 노력하고. 살찐 게 자랑이었으니까. 서로에 대한 마음도 너무 애틋하고. 여배우들이 많이 모이면 서로를 탓하거나 흉보거나 할 수도 있지 않나. 솔직히 처음에는 그런 부분도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 좋았고 많이 배웠다.
-실제 골키퍼였던 오영란 선수에게 그때 심정을 물어본 적 있나. =그러지는 못했다. 하지만 3개월 동안 핸드볼 선수로, 우리는 배우가 아니고 선수다라고 생각하면서 살려고 노력해서 그런지 나중에 카메라 세팅하고 슛 들어가도 감정이 계속 유지되더라. 단지 관객에게 이 감정이 전달되어야 할 텐데 하고 걱정했다. 처음에는 그게 잘 안 됐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나. =실제처럼 전달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몸도 던지고 그랬는데, 이상하게 모든 게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더라. 더군다나 연습기간도 짧았고. 하지만 사람에게 괴력이란 게 있고,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잘 못했던 걸 막상 들어가면 발휘하게 되는 게 또 배우들이기도 하더라. 그런 부분이 많이 차지했던 것 같긴 하다. 선수처럼 보여야 한다. 그들을 욕되게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일반 관객과 함께 시사회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그들의 반응으로 봐서는 당신의 그런 마음이 충분히 전달됐으리라고 본다. =하하, 그랬나. 나도 그냥 겸손 한번 떨어본 거다. 사실 그 말이 듣고 싶었다.
-…낚였군. 어쨌든 확실히 선수 다 됐겠다. =너무 선수가 되는 통에 나중에는 다들 연기가 안 되더라니까. “어떻게 해. 우리 진짜 (핸드볼) 선수 됐나봐, 이제 연기가 안 돼.” 이럴 정도였으니까.
-임순례 감독은 수희 역의 당신에게 어떤 점을 강조하던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 점을 중요하게 여겼나. =골키퍼가 원래는 건장한 사람이어서 내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작가나 임순례 감독에게는 다른 사람이 머릿속에 있었다. 내가 합류하면서 캐릭터가 바뀐 거다. 내가 비리비리하고 해서 재빠른 골키퍼로 캐릭터를 바꾼 거다. 어쨌든 많이 먹고 내 자신을 사육시켜서 살도 많이 쪘는데, 억울한 건 골키퍼 옷이 다 긴 팔에 긴 바지 아닌가. 살찐 게 티가 나야 말이지. 의상팀에서는 걷어보라고 하는데 그것도 말이 안 되고.
-몸 만드는 것 외에 드라마적인 부분에서는. =너대로 하라고 했다. 리딩 끝나고 나서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운동선수니까 좀 강한 면모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캐릭터가 잘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 수희 캐릭터 잡는 게 좋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쑥스럽긴 하지만 그때 작가님이 말씀하시기를 “전교 1등 하는 사람이 한 문제 틀렸다고 징징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내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주면 될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당신은 아무래도 신발에 발을 맞추는 타입은 아니다. 그게 앞으로의 연기 생활에서 좋은지 나쁜지…. =응? 좋은지 나쁜지의 그 좋은지? 하하, 농담이다. 아무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합류하겠다고 했던 거겠지. 나는 지금까지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했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더라도 일단 마음이 끌리면 하는 스타일이다. 모든 배우들이 다 마찬가지 아닐까?
-여자 배우들에게는 누구나 한번쯤 고상하고 아름답게 비쳐지는 그런 역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 같던데, 아직까지는 그런 역할을 한 적이 없다. 욕심이 날 법하다. =(손가락으로 찡긋 감은 한쪽 눈을 살짝 쓸어내리며) 요렇게 한쪽 눈으로만 눈물 흘리는 그런 거? 하하. 그런 역할이 주어진다고 해도 기존의 전형화된 것과는 상반되도록 연기하겠지. 실은 그런 욕심 전혀 없다. 지금 현재가 나는 너무 행복하다. 나라고 왜 더 스타가 되고 싶지 않겠나. 소싯적에는 더 했다. 임상수 감독님 첫 작품 <눈물>에서 연기할 때는 보여지는 것에만 환호하는 나이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연기를 잘해야겠다는 꿈은 없었다(조은지는 임상수의 <눈물>(2000)로 데뷔했다). 어쨌거나 시간이 흐르고 내게도 아픈 시간이 생기고, 연기나 배우의 인생에 자부심도 느끼고, 배우에 대해 회의도 해보고 하면서 많이 깨닫게 됐다. 주변 도움도 많이 받았고. 그걸로 인해 내 성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많이 바뀌었다. 힘든 부분을 예전에는 아예 모른 체하고 지나갔다면 지금은 더이상 모른 체하지 않는다. 밑바닥까지 가본 적이 있으니까. 그때 다른 사람들 말들이 메시지가 됐고, 내 마음이라든지 생각들을 어떻게 작품에 맞춰야 하며, 조은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부심이 생긴 거다.
-임상수 감독이 <눈물> 때는 천재라고 해놓고, <그때 그 사람들> 때는 아무래도 천재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던데. 본인은 누구 말을 더 믿나. <눈물> 때의 임상수? <그때 그 사람들>의 임상수. =푸하하. 맞다. 그랬다. 사실 <눈물> 찍을 때는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은 극찬이었는지 잘 몰랐다. 이제 다시 잘 바꾸려고 노력해야지.
-지금 다시 천재가 되려고. =아니, 천재 그거 소용없다니까. 첫 작품에 어느 정도 했으니까 천재 소리 들은 거지. 물론 매번 들으면 좋겠지만, 다른 점에서 더 나아져야겠다는 생각이다.
-연기 생활 초반하고 어떤 차이점을 가장 크게 느끼나. =나 혼자 만들어가야 하는 부분이 많아진 것 같다. 예전에는 캐릭터에 내가 어떻게 들어가? 나는 조은지인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내뱉고 인식하는 게 중요하고 큰 차이가 난다. “나는 수희야, 수희야” 그렇게 자꾸 말하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된다.
-시나리오 쓴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는데, 그럼 혹시 연출할 생각이? 임순례라는 한국에서는 독보적인 여성감독과 일한 배우로서 배운 점도 있을 것 같다. =연출은 전혀! 그러기에는 배워야 할 게 더 많은 것 같다. 뭐 돈 되는 시나리오 써서 팔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돈 되는 시나리오 있는 모양이다. =그냥 어떤 소재가 있다고 마음 맞는 PD에게 얘기했는데 그거 좋겠다고 그러더라. 근데 이건 안 쓰고 그냥 들어주면 안 될까?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내가 일본 갔을 때 일인데….
-사람이 몸에 밴 게 무섭다고 한다. 영화는 끝났어도 핸드볼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끼리 한 얘기가 있다. 조기 축구회처럼 조기 핸드볼회를 만들어서 해보자고. 비인기종목이어서인지 핸드볼계는 여러 가지 사정이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핸드볼을 홍보해보자고도 했다. 특히 어린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보고, 일년에 네번이라도 계절마다 찾아간다거나 해서 같이 즐기고 배우자고 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여자들의 우정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남자들의 우정이 지나치면 곧잘 부담스러워지는 것에 반해 여자들의 끈끈한 우정은 거의 항상 믿음직스럽고 귀엽다. 때론 여자들의 우정이 훨씬 선량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알콩달콩 다 같이 모여 연기를 해본 게 되게 그립다. 언제 다시 이번 같은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다. 언니들한테 묻는다. “우리 영원한 거죠? 우리 영원한 거죠?”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