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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의 CF] 공부해서 예쁜 여자, 잘난 남자 낚아보세?

원더걸스와 성시경을 내세워 어른들의 속물적 근성 보여주는 빨간펜 CF

이른바 시즌 CF들이란 게 있다. 새 학년 시작하기 직전의 겨울방학이라면 교복 CF가 쏟아져나오고, 노트북 광고들도 늘어나며, 참고서와 학습지 광고들도 늘어난다. 교복들은 어찌나 몸매를 강조하는지 저 교복 입으면 다들 다리도 길어지는 동시에 쭉쭉빵빵 몸매가 될 것 같고 학습지 광고들은 어찌나 번드르르한지 저것만 시작하면 다들 영재가 될 것 같다. 교복 브랜드가 달라진다고 후진 디자인의 칙칙한 교복이 만화 속 교복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느라 무거워진 몸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것도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새 학년’이라는 기대감을 가진 학생과 엄마들은 이런 유혹에 잘 넘어가곤 한다.

아무튼 이런 방학 성수기 광고들 중 유독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빨간펜. 원더걸스랑 연인이 되려면 빨간펜으로 공부해서 경시대회에 나가서 신문에 나면 된다는 꿈을 꾸는 소년편과 성시경이랑 결혼을 하려면 빨간펜으로 공부해서 경시대회 나가서 신문에 나면 된다는 꿈을 꾸는 소녀편이 동시에 전파를 타고 있다. 학습지 CF에서는 흔치 않은 빅모델 전략이라 눈에 띄긴 한다(하긴 구몬학습도 ‘무한도전’팀을 내보내고 있으니 빅모델이 요즘 학습지 시장의 대세일 수도 있겠다).

으음. 하나 어쩐지 좀 껄쩍지근허요. 요즘 소년 소녀들은 정말 이런 엉큼하고도 비루한 꿈을 꾸는 건가요? 세상에나 소년아, 생긴 건 순진하게 생겨서 어찌 꿈을 가져도 그 다섯명이랑 한꺼번에 떼로 데이트하는 꿈을 꾸는 게냐. 데이트는 한번에 하나씩, 그것이 연애세계의 정도이거늘! 게다가 소녀야, 꿈이라고 꿀 것이 결혼밖에 없단 말이더냐. 비 앰비셔스는 비단 소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을 엄마 아빠가 일러주지 않았나보네.

뭐, 요즘 애들이 연예인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알겠다. 동화 같은 꿈을 꾸는 것도 알겠다. 나도 소녀시절 서태지랑 연애하는 걸 상상한 적 있었으니까(어머나, 세상에). 그래서 우리도 한번 애들이 환장한다는 빅모델 써서 애들 시각의 광고(처럼 보이는 광고) 만들어보자 하는 마음도 알겠다. 하지만 도대체 이건 뭐, 공부의 목적 자체가 틀려먹었잖아요. 서태지랑 결혼하자고 공부한 건 아니란 말이죠. 애들 수준을 너무 무시하시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아예 틀린 얘기를 한 것은 아니다. 결혼정보회사의 고객을 나누는 기준에 보면 분명 A급, B급, C급으로 나누는 학력이 중요한 항목으로 존재한다. 고등학생 때 틈만 나면 ‘시집 잘 가려면 공부해라, 이 가시나들아!’라며 윽박지르던 (엄청 싫어했던) 선생님도 여럿 있었지. 하지만 이 우울한 현실을, 연애와 결혼이라는 가장 사랑스러워야 할 부분마저도 공부 잘하는 사람들만이, 그리하여 엘리트라 칭해지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바꿔버리는 이 현실을 아이들에게까지 물려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 CF를 만들었을 때의 기대효과는 아마도 이 CF를 본 애들이 ‘나도 원더걸스 누나들이랑 데이트하고, 성시경 오빠랑 결혼하려면 공부를 해야지!’라는 마음을 갖고 부모에게 빨간펜하겠다고 조르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나 결국은 ‘너, 잘생기고 돈 많은 사람 만나려면 너도 공부해야 해!’라는 어른들의 속물적 협박을 아이들의 꿈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합리화하고 어루만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이들에게 원더걸스랑 데이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물어보라. 아마 공부는 때려치우고 지금부터 연예기획사에 들어가 원더걸스에 맞먹는 아이돌 그룹으로 커야 한다고 대답할걸? 경시대회 일등한다고 신문에 나는 일은 20년 전 88올림픽 즈음의 옛날옛적 이야기고, 신인가수가 되어서 데뷔하는 것이 신문에 나서 원더걸스랑 손이라도 잡아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일이란 걸 애들도 다 안다. 그저 어떻게든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그럼 너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며 갖다붙여놓았을 뿐. 그러나 그 ‘포장’이란 게 얼마나 비루하고 안타까운지 애들한테 부끄럽다.

CF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가장 민감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이 ‘빨간펜’ CF가 보여주는 속물적인 공부의 목적에 혀를 차고 얼굴을 찌푸리는 한편, 그것이 지금 교육의 현실이자 부모들이 애들 성적에 목매다는 실질적 이유란 사실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하긴, 그럼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었지. 자립형 사립고도 수백개로 늘린다는 이 마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