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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돈을 갖고 튀어라
이영진 2008-01-17

1970년대, 배우들 쇼 출연시켜 제작비 챙기고 잠적하는 제작자도 등장

2001년 8월9일 오전. 대구의 한 영화사 사무실은 메아리없는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신섬유소재 개발을 둘러싼 첩보액션영화 <나티 프로젝트>에 투자했으나 제작자인 이모씨가 촬영을 앞두고 잠적했다는 말을 듣고 항의하러 나온 100여명의 투자자들 때문이었다. 부산을 살린 <친구>처럼 <나티 프로젝트> 또한 대구를 회생시킬 것이라는 말만 철석같이 믿었던 이들은 이씨의 도주로 인해 결국 제작비 30억원을 훨씬 상회하는 약 100억원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월 10% 이상의 고이율 배당”을 꿈꾸며 <친구> 따라 영화에 투자했던 지역민들 외에도 피해자는 더 있었다. <나티 프로젝트>에 출연키로 했던 배우들이었다. 지역방송을 통해 영화제작 소식이 알려진 터라 이들 또한 사기꾼 이모씨와 한 패거리로 오해받았다. 영화제작이 노다지 채굴 사업처럼 여겨지던 때 벌어진 불상사였다.

돈이란 게 그렇고 욕심이란 게 그렇다. 넘쳐도 탈이고 부족해도 탈이다. 1970년 3월 <영화잡지>에 실린 ‘촬영 겸 쇼 따라 갔다가 망신(당)한 스타들’이라는 기사를 보면 수긍이 간다. 먼저 해프닝 전의 정황을 좀 살펴보자. 1970년이 어떤 때인가. TV에 주도권을 빼앗긴 뒤 충무로는 저질영화 양산 논란으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이 와중에 지방의 극장들을 소유하고 있는 전주(錢主)들은 하나둘 도산하기 시작했다. 지방흥행사로 불리며 충무로 행차시 자신들의 입맛대로 시나리오와 캐스팅까지 주물럭거리며 위세를 부렸던 이들이 하나씩 거꾸러졌다. 대규모 인구의 서울 유입과 브라운관의 득세라는 이중고에 직면했고, 또 이로 인해 관객 수가 1960년대에 비해 무려 절반 수준으로 줄었으니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셈이다. 대부분의 영화제작이 지방 극장에서 올라온 선수금(先收金)으로 이루졌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타격이었다.

그렇다고 가만 앉아서 굶어죽을 순 없는 일. 쇼 흥행업자 출신으로 <석양에 묻어다오>라는 영화를 제작하고자 했던 박모씨는 꿩 먹고 알 먹을 수 있는 기지를 발휘했는데, 처음에는 모두들 “1천만불짜리” 아이디어라고 박수를 쳐댔다. 출연배우들을 몽땅 대구로 몰고 내려가 극장에서 쇼를 한바탕 벌인 다음 거기서 나온 수익으로 현지 촬영을 진행하겠다는 게 박씨의 복안. 극장에서조차 수익 보장 못하는 영화 상영 대신 쇼를 유치하겠다고 달려들던 판이었으니 어느 정도의 흥행은 예상 가능했고, 거기서 벌어들인 돈을 다시 지역경제에 환원하는 셈이니 대구 시민들에게도 환영받을 만한 프로젝트였다. 게다가 신성일과 문희라는 여전히 지지 않는(1970년 이 두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는 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10편이 훌쩍 넘는다) 두 스타까지 가세키로 했으니, 기백만원을 들여 대대적인 선전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극장보다 몇배 더 많은 관중을 끌어모을 수 있는 대구공설체육관에서 쇼를 벌이기로 한 바로 그날. 가케모치 뛰느라 공연 당일에서야 서울에서 급히 내려왔던 배우들이 대구 시민들로부터 얻어들은 건 갈채가 아니라 욕이었다. “아침부터 인산인해를 이뤘던” 군중은 “야, 이 사기꾼들아!”라며 배우들을 몰아세웠고, 한편에서는 당장 환불하지 않으면 스탭들을 모두 족치겠다고 협박이었다. 전날 지역신문에까지 대문짝만하게 광고가 나붙었던 공연이 갑자기 취소됐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급기야 분을 참지 못하고 이들에게 성난 돌팔매질을 해댔고, 이로 인해 이철, 배수천 등의 조연배우들은 부상을 입는 등 봉변을 당했다. 예상치 못했던 소동으로 400원짜리 고급호텔에 머물며 호식을 즐기던 주연배우들은 무대에 서지도 못하고 서둘러 짐을 싸서 상경하기 바빴다.

미처 공연장 사정을 파악 못한 게 화근이었다. 애초 대구공설체육관은 준공 당시 지역 극장협회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는데, “3년 동안 쇼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그걸 미처 파악 못하고 제작진은 현지 체육관과 계약을 치렀고, 코앞에서 대규모 버라이어티쇼가 벌어지는 걸 뻔히 알면서 대구 극장협회에서 좌시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극장 입장에서는 돈 내고 관객 뺏기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작자인 박씨를 동정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제작 기일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의심도 피어올랐다. 특히 거창한 대구 로케이션을 감행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카메라와 필름조차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충무로 호사가들이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쇼가 성황리에 진행됐다면 현지 촬영이 제대로 진행됐을까. 지금 확인할 길은 없으나 저간의 사정만 놓고 보면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충무로가 하 수상타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모두들 어렵다고, 허리 조이고 또 조여도 답이 안 나온다는 하소연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무자년 아침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홍 반장은 어디로 갔느뇨. 구원투수 찾았는데 제 혼자서 살아보겠다고 ‘인 마이 포켓’하는 굳은 심보의 ‘먹(고)튀(는)족’이 또 한번 불쑥 튀어나올까 무섭기도 하다.

참고자료 <영화잡지> <한국영화 배급사 연구> <씨네21>(3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