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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몸에 맞는 옷이 날개

초등학생 수준으로 싸우는 남자들 이야기 틈에서 홀로 고고히 빛나는 다이앤 크루거의 스타일 <내셔널 트레저: 비밀의 책>

<내셔널 트레저: 비밀의 책>에서 진정한 내셔널 트레저는, 비밀스럽게 묻혀 있는 황금의 제국도 아니고 한쌍으로 이루어진 결단의 책상도 아니고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대통령 납치까지 결행하는 니콜라스 케이지도 아니고 바로 다이앤 크루거다. 가만 그녀는 독일 출신이라 내셔널한 트레저는 못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다이앤 크루거의 스타일이야말로 명실공히 이 영화의 트레저가 될 만했다. 하지만 몇년 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던 <트로이>에서는 아름다우나 다소 넙데데한 마스크를 지닌 그녀가 헬렌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저 여자 때문에 에릭 바나와 올랜도 블룸, 브래드 피트와 숀 빈이 편을 먹고 자그마치 십년이나 전쟁을 치렀다고? 차라리 로즈 번(브리세이스 역)하고 다이앤 크루거가 서로 머리채를 잡고 에릭 바나, 올랜도 블룸, 브래드 피트를 두고 전쟁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더 리얼하겠다, 헬렌보다 파리스가 더 예쁘게 생긴 이 마당에…. 하지만 한 열흘 만에 뚝딱뚝딱 완성된 트로이의 목마에서 훌쩍 뛰어내려 보무당당하게 질주하는 아킬레스가 나오는 이 영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놀라울 것 없었다. 어쨌거나 <트로이>의 다이앤 크루거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내셔널 트레저>를 보니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유난히 청초한 남자배우가 많이 나온 탓도 있었지만 혐의는 그녀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그리스식 의상에 있었다. <트로이>의 울분을 풀기라도 하듯, <내셔널 트레저: 비밀의 책>에서 다이앤 크루거는 자신에게 꼭 어울리는 엘리건트 레이디 룩을 영화 내내 선보인다. 첫 등장 때 입었던 이브닝드레스를 비롯해서 결단의 책상을 보기 위해 니콜라스 케이지와 박물관에서 일부러 요란법석을 떠는 장면에서 입고 있던 카디건과 원피스, 백악관에 들어가 귀걸이가 없어졌다며 주의를 끌 때 입고 있던 드레스와 귀에 달고 있는 간단한 진주 귀걸이까지, 과하게 여성스럽거나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지만 더없이 우아한 느낌을 준다. 그 밖에도 천박스럽게 보이지 않을 만큼 절묘하게 앞코가 뾰족한 숙녀다운 하이힐과 라인이 똑 떨어지는 고전적인 코트를 입는 등 그녀는 전체적으로 무리한 스타일링을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시크’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소 구닥다리로 보일 위험이야말로 엘리건트 레이디 스타일의 핵심이 아닐까. 문서보관 팀장이라는 지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레이디라고 해서 주인공의 발목이나 잡고 꺅꺅거리는 연약한 아가씨로 나오는 것은 아니고, 전편에서 픽업트럭 문짝에 위험하게 매달렸던 것처럼 대단한 액션은 없지만 그녀는 부지런히 주인공의 뒤를 따라다님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수행한다. 또한 그럴 때 입는 평상복을 입고도 그녀는 여전히 드레스를 입었을 때처럼 아름답다. 그것들은 디테일 없는 팬츠에 단색의 터틀넥 등 DKNY나 캘빈 클라인에서 협찬했을 만한 심플한 옷들인데 패션 전문가들의 견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의 다소 뒤틀린 견해에 따르면 이렇게 장식없는 옷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최고의 장식을 가져야 아름답게 소화할 수 있는 옷들이다. 그 장식은 바로 ‘미모’다. 밋밋하게 생긴 여자가 저런 옷을 입어봤자 그냥 지루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니까.

영화 내내 탐욕스럽게 눈을 번들거리며 다이앤 크루거를 열심히 쳐다보고 지금 그 이야기를 열렬히 적고 있는 이유는, 그거 말고는 별로 말할 게 없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영화 내내 한마디밖에 외치지 않는다. “우리 할아버지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가 자기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계속 외치고 있는 근거 역시 간단하다. “왜냐하면… 우리 할아버지니까!” 대통령을 납치한 그는 황금 제국을 도덕을 위해 후세를 위해 어쩌고저쩌고 열심히 떠들지만 기저에 깔린 것은 역시 한마디다.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나쁜 사람 아니란 말이에요!” 그에게 맞서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에드 해리스 역시 영화 내내 하고 있는 말은 똑같다. “우리 집안도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야!” 남자들이 그렇게 세상을 구하고 가문의 명예를 윤나게 손질할 동안 나는 여자답게 옷 이야기나 할 테다. 돈 더 들인 블록버스터가 전편보다 나아진 것은 할아버지 타령하는 남자들이 보기에는 그냥 가문을 잇지 못하는 여자에 불과할 다이앤 크루거의 스타일뿐이라니, <내셔널 트레저> 3편을 제작할 거라면 이거 아무래도 제작진이 다 같이 결단의 책상에 모여 앉아 회의라도 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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