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는 해마다 잊힌 한국의 옛 영화인들을 발굴하고 재평가하는 작업을 벌여왔다. 김기영, 이만희, 정창화, 김수용 감독, 그리고 배우 김승호 등이 이 회고전을 통해 현재의 관객과 멋진 대화를 나눠왔다. 이두용 감독은 진심으로 여기 추가하고 싶은 이름이다. 1981년 <피막>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그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화두의 원조쯤 되며(같은 해 임권택 감독이 <만다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 1983년 <물레야 물레야>는 현재 한국 영화인들에게 어떤 상징과 같은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첫 번째 한국영화였다. 1970년대 데뷔 초의 그는 <어느 부부>(1971) 등을 통해 당대의 주류라 할 수 있었던 낡은 멜로드라마의 관습과 싸웠고, <용호대련>(1974)으로 시작된 이른바 태권 액션영화의 놀라운 활력은 홍콩과 일본의 액션영화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독창성을 보여줬다. 이후 1980년대에도 한국 영화계에서 ‘임권택-송길한’이라는 감독과 작가의 파트너십에 겨룰 만한 ‘이두용-윤삼육’ 체제를 구축해 장르영화의 작가주의, 어느 한쪽으로 수렴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세계를 보여줬다. 당대 여느 감독들과 비교해도 남다른 편집 리듬의 속도감과 사실성은, 1년에 네댓 편의 영화를 양산하면서도 자신의 일관성과 장인정신을 잃지 않았던 그의 고집을 보여준다. 가장 최근에 만든 영화는 <아리랑>(2002)으로 그는 여전히 차기작을 고심하는 중이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하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오승욱 감독이 추천한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이 상영된다. 개봉 당시 검열로 40여분이 잘려나간 채 동시대인들에게, 그리고 후배 영화인들에게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던 이 영화는 1970년대를 마무리하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성과이자 이른바 ‘한국적 하드보일드’의 걸작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2년 전 영상자료원이 발굴, 복원한 <최후의 증인>을 154분 원본 그대로 상영하는 것은 물론, 특별전 형식으로 그의 다른 작품들인 <피막>(1980), <물레야 물레야>(1983), <뽕>(1985), <내시>(1986)를 소개한다.
-<최후의 증인>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해도 예산문제도 그렇고 남다른 야심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내게는 굉장히 특별한 영화다. 1978년에 촬영을 시작해서 무려 1년 동안 찍은 영화다. 6·25 영화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다가 김성종 작가의 <최후의 증인>이 눈에 들어왔고 영화를 완성했다. 이제 정말 내 모든 걸 담아서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컸다. 그렇게 거대 권력 속에서 이름없이 사라져간 민초들을 그리고 싶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한 사람을 형무소에 넣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 법집행관이 아무렇지도 않게 비리를 저지르고 그런 치부를 다 드러내서 시대를 폭로하고 싶었다. 그렇게 6·25 역시 중요한 배경으로 쓰이긴 하지만 단순한 전투영화가 아니라 심층적인 드라마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무지하지만 착한 사람들이 권력에 마모되고 상처받는 그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몹시 착해서 남 뺨 한번 때리지 못하고 살아온 황바우(최불암)와 지혜(정윤희) 같은 사람을 통해 척박한 시대의 풍경 속에서 진짜 아름다운 건 무엇인지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후의 증인>은 검열에 걸려 무자비하게 삭제당하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당시 1979년도 대종상 작품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였는데, 경쟁자 중 누군가가 청와대에 감독의 사상이 이상하다고 투고를 했다. 나를 빨갱이로 몰고 인민군을 미화한 거 아니냐고 공격한 거지. 그래서 검찰청에 불려갔다. 그 소문이 나서 제작자가 서둘러 다 자르고 나는 검찰청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최후의 증인>에서 황바우 구명운동을 하는 아내 지혜를 검사가 속여 겁탈 비슷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그보다 몇년 전 내 영화인 <경찰관>(1978)에서는 파출소장의 아들이 검사의 딸과 연인 사이인데, 검사 집에서 반대해서 파혼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 장면들을 두고 “검사한테 무슨 원한 있냐?”라는 말까지 들었다. 거의 24시간 넘게 꼬박 잠도 못 자고 조사당하고 풀려나는데 기분이 정말 안 좋고 답답했다. 원작과 큰 차이는 없어서 그나마 괜찮았다. 나더러 사상이 이상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거 원작에 다 있는 거”라고 따졌던 거지. 그렇게 사람들이 무지몽매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극장개봉을 해서 가보니, 1차 편집으로 2시간53분 정도로 만든 영화를 1시간20분짜리로 만든 것 아닌가. 정말 내가 영화를 왜 하나, 하는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젊을 때라 더 울분이 컸고 그냥 영화계를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밀고 탓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니까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다음엔 이데올로기에 대한 간섭이 좀 덜한, 편한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에 <최후의 증인>을 함께한 윤삼육 작가와 상의해서 <피막>을 한달 만에 만들었다.
-편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피막> 역시 여느 사극과 다른 독특한 미스테리 구조를 보여준다. =이후에도 사극은 많이 만들었지만 옛날 얘기를 그냥 재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윤삼육 작가하고도 뭔가 미스테리컬한 문법을 시도해보자고 했고, 어렵지 않게 소재 택해서 시작한 작품이 <피막>이다. 내가 지금껏 60편 넘게 영화를 만들었는데 정말 말 그대로 검열 걱정 없이 가장 편하게 만든 작품이다. 안동 하회마을에 오픈세트를 지어놓고 자연광은 물론 새벽안개도 담았고, 저녁에는 칠 줄 모르는 고스톱도 치면서(웃음) 여유를 즐겼다. 총 28일 촬영했는데 이전과 달리 다른 스탭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경직되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만든 영화가 해외영화제에 초청되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윤삼육 작가와는 <피막> 외에도 <뽕> <내시> <업> 등 중요한 사극들을 함께했는데 <물레야 물레야>는 임충 작가의 시나리오다. 어떤 차이일까? =<물레야 물레야>는 다른 작품과 달리 한림영화사에서 가지고 있던 각본으로 먼저 연출 의뢰가 온 작품이다. 그래서 계속 의견을 주고받으며 파트너를 이뤘던 작가는 윤삼육 작가가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다. 날렵하고 샤프한 맛은 없어도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고 글에서 흙 냄새가 났다. 메주덩이처럼 끈덕지고 느려서 말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가 촌스럽게 짝이 없는데 그게 이상한 힘이 있었다. 필력을 자랑하려고 날씬하게 쓰는 게 아니라 그런 진득한 냄새를 풍겨서 좋아했다. <물레야 물레야>는 각본은 좋았는데 3가지 에피소드의 옴니버스영화였고 어딘지 <전설 따라 3천리> 같은 느낌이 풍겼다. 그래서 당시 김갑의 기획실장에게 굳이 3개의 이야기로 나눠 카메라로 옮기는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얘기하고 거절했다. 어떡하면 좋겠냐고 묻기에 한 이틀만 시간을 달라고 했고, 3개의 이야기를 묶어 봉건시대 속의 한 여자의 기구한 팔자 이야기로 풀고자 했다. 아무래도 <피막> 이후의 작품이다 보니 좀더 신경을 썼던 것 같고, 한국적 ‘한’과 문화의 정서를 짙게 드러내고 싶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한 우회로로 택한 사극 장르에 이후에는 본인이 더 빠져든 것 같아 보인다. =사실은 <피막> 전에 <초분>(1977)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멜로드라마를 하다가 액션영화로 넘어갔는데 그것 역시도 검열문제로 고생했고, 심지어 ‘으악새 영화’라는 천대를 받다보니 액션에서 손 떼고 어쩌면 <최후의 증인>보다 앞서서 정말 제대로 된 영화를 해보자고 마음먹은 작품이다.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식이기도 했지만 본래 사극이라기보다 우리 근대사에 관심이 많았다. <초분>에서 보여준 샤머니즘과 미스테리의 조합, 우리 민속과 토속에 대한 관심이 <피막>에 반영됐다고 보면 된다. <초분>은 마을 박수무당이 혹세무민해서 땅을 팔게 하는데 그게 아파트 단지를 만들기 위한 뒷거래와 연결된다. 그렇게 그냥 과거 얘기로만 한정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피막>이 처음 나왔을 때도 어떤 비평가가 “무슨 사극이 저러냐”고 비판한 적도 있다. (웃음) <피막> 전에 만든 <물도리동>(1979) 역시도 그런 스타일의 연장이었다.
-<뽕>도 어두운 원작과 달리 이두용식 변형과 윤삼육의 해학이 돋보이는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에로영화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사실 원작을 보면 영화 할 맛이 안 난다. (웃음) 어둡고 칙칙하고 척박한 땅에서 사는 모습이 돼지우리 같기도 하고. 아마 시대적 영향이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아무래도 그런 점들이 나하고 잘 맞지 않았다. 일제 압제하의 모습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싫었다. <뽕> 역시도 윤삼육 작가가 구름에 달 흘러가듯이 잘 썼다. 무엇보다 해학적이고 풍류도 담으면서 요절복통하게 그려내자고 했다. 그런데 당시 그런 비슷한 제목의 에로영화들이 많다보니. (웃음)
-무엇보다 <뽕>은 당시 여느 사극과 비교해도 남다른 로케이션 촬영을 보여줬다. =맞다. 한참 헌팅을 다니다 보쌈마을이라는 그 마을을 찾는 순간 ‘이 영화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용인 민속촌 말고는 딱히 선택할 여지가 없었는데, 거기는 전봇대도 있고 가옥 구조도 축소형이라 전체적인 배경으로 쓰기에는 좋아도 그 안에서 직접 촬영하기에는 좋지 않았다. 나는 한정된 공간에 스탭과 배우들을 몰아넣고 찍는 걸 즐겨서 그런 방식이 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경남 합천 어딘가에 20, 30호 정도가 거주하는 그런 좋은 마을이 있다고 해서 찾으러 갔다. 그런데 비가 억수같이 오고 차가 개울에 빠져서 차 건지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면서 나는 슬슬 산쪽으로 올라가봤는데 언덕에 딱 올라서니까 정말 무슨 솔로몬의 보물을 찾은 것 같은 마을이 있었다. 차 끄집어내던 스탭들도 일을 멈추고 보더니 다 입을 쩍 벌릴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원래 세트 촬영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집수리하고 전봇대 뽑고 해서 촬영을 시작했다. 이후 영화가 개봉하고 그곳이 유명해지면서 언론사나 방송사에서 취재를 많이 갔다.
-<내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인데 아무래도 궁을 배경으로 하니까 변형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신상옥 감독의 이전 작품 <내시>(1968)도 신경이 쓰였을 것 같고. =사실 신상옥의 감독의 작품은 못 봤다. 선입견을 가질 것 같아 일부러 안 봤는데 그 극단적인 소재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내시>는 내 영화사인 두성영화의 창립작이기도 해서 더욱 본격적인 내 이야기를 펼쳐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남자가 살기 위해서 거세한다는 게 굉장히 강한 인상을 줬다. 궁에서의 출세가 문제가 아니고, 몹시 가난하니까 어려서 살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의 얘기가 너무 처절했다. 또 그들의 일이란 게 왕의 여자의 정조를 지키는 일인데, 아랫도리가 없는 사람들이 아랫도리를 지키는 일을 한다는 게 정말 아이러니하고 기막히는 일이다. 그만한 희비극적 소재가 없었다. 당시 홍보비까지 포함해서 5억원 정도를 썼는데 당시로서는 거의 최대 규모였다. 안성기가 가진 순박함이 영화에 잘 담겼고, 많은 사람들은 건장하고 당당한 미남자인 남궁원을 내시로 쓴 것을 많이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를 준비하면서 실제 조선시대 내시를 만나기도 했는데 거세하면 오히려 키가 커지고 체격이 커진다고 했다. 드라마를 보면 내시가 왜소하고 앵앵거리는 사람들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거다.
-지난 2005년에는 오히려 국내가 아닌 프랑스 브졸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열기도 했는데, 후배들의 추천으로 국내에서도 이런 재평가 작업이 시작돼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최후의 증인>은 2년 전 영상자료원의 발굴로 보게 된 건데, 말하자면 이제야 내 영화를 원본 그대로 스크린에서 보게 된 거다. 그런 현실이 슬프긴 하지만 <최후의 증인>을 중심으로 후배 감독들이 인정해준다는 사실이 기쁘다. 요즘 한국 영화계 상황이 좋지 않다고들 하는데도 이런 의미있는 일을 해준다는 생각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게다가 영화감독들이 영화 만드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이런 행사까지 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숙연해지기도 하면서 앞으로도 좋은 작품들을 계속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