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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경계인이 만드는 새로운 현재

이방인이자 경계인이 기록하는 역사 기술, 재일 조선인 김덕철 감독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

12월이 되면 시간이 급히 흐르기를 바란다. 끝이 빨리 가기를 바람에서다. 가당찮은 생각을 품어서인지 12월 내내 내 마음은 느릿느릿, 시름시름하는 편이다. 느림과 시름을 안고 저녁 무렵 조안리로 이어지는 시우리고개로 산책을 나갔다. 일요일 5시를 지나 6시로 가는 저녁으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산등성에 가지런히 선 겨울나무들의 평상심에 감탄치 않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마는 난 늘 그 나무들로부터 배우는 느낌이 든다. 겨울나무들의 자태는 그대로인데 내리는 어둠이 낯설었다. 겨울밤의 칠흑 같다는 어둠과 달리 이른 저녁의 어둠은 오히려 희끄무레한 빛을 내놓고 있다. 그래서 지는 태양이 아니라 내리는 어둠이 길을 밝히는 느낌을 준다. 꽤 높은 산이 늘어선 시우리의 지형 때문일까? 죽음의 시간도 칠흑 같지 않고 이만큼의 어둠이기를 바라는 저녁이다. 이런 계절이니만큼 사실 난 한국형 블록버스터나 다른 블록버스터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매우 명랑한 영화도 가당찮다. 반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그 제목처럼 한해를 건너가는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 볼 만한 영화다(문석 기자의 “남북일의 바람직한 미래상” 기사 참조).

한국계 경계인들의 영화들

김덕철 감독의 다큐멘터리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부터 주목받다가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내가 자이니치(재일) 조선인인 김덕철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일본국제교류재단의 아시아문화센터 초청을 받고 일본에 갔던 90년대 후반 무렵이었다. 김기영 감독 회고전 행사였고, 내 강연회가 끝난 뒤 김덕철 감독은 나카가와 노부오 감독의 스탭이었던 일본인 친구와 함께 나를 데리고 근처 식당으로 가 저녁을 사주었다. 알고보니 다른 재일 조선인의 촬영감독으로 활약하고 본인도 감독으로 활동하는 분이었다. 이후 야마가타영화제 등에서 마주치면 그는 늘 젊은 한국인 감독들을 돌보아주고 있었다. 한국에 가서 학생도 가르치고 작품도 만들고 싶다는 말을 한 것도 기억난다. 이후 한국에 와서 활동하는데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키네마준보 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감독의 <건너야 할 강, 1994> 이후의 작품이다. 이 다큐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인물도 다양하다.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유족회 회장이던 고 김경석씨와 재일 조선인 및 외국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세키다 목사, 재일 조선인 3대사에 관한 이야기 <재일삼대기>를 일인극으로 연행해오면서 고려박물관 건립을 주도한 송부자씨, 또 한국의 부천고등학교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한·일관계를 고민하는 다카키 구미코 등 여러 세대에 걸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북한이라는 세 꼭짓점을 드나들며 구성된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다른 픽션영화, 장률 감독의 <경계>나 최양일 감독의 <>처럼 해외의 한국계 감독들이 경계인의 시점에서 한국의 내부와 외부 그리고 이산민과 유민사를 포함하는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들과 함께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의 영화시장이 일정한 규모를 갖추면서 구성된 관객층과 더불어 말이다.

이방인의 위치에서 내부의 역사를 기술한다

영화이론가이자 영화사가로 알려진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영화만이 아니라 “집단 장식”(Mass Ornament)과 같은 근대성의 표면과 휘발성의 기표들을 다룬 책을 쓴 근대와 사진, 영화의 배열과 관계를 다룬 학자다. <영화 이론>을 쓴 뒤 <역사: 마지막 이전의 마지막 것들>이라는 책을 썼다. 여기서 그는 역사 기술을 철학의 진리 증명 주장과 수학적 과학에 맞서 옹호한다. 크라카우어의 생각으로 역사 기술과 사진은 구체적인 것에 특별한 접근을 할 수 있다. 이미지와 사물의 세계의 구원과의 관계는 사물에 대한 환기와 역사 기술자의 컬렉션과 이야기들에 대한 관계와 같다. 어떤 의미에서 역사 기술자는 현대의 시간으로부터 추방된 자다. 그는 침묵의 관찰자로서 외지에 거주한다. 크라카우어는 이러한 역사 기술자의 이미지는 망명을 그 모델로 취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망명의 진정한 존재 양식은 이방인이라고 쓴다. 위대한 역사가들은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자기를 지우는 행위 혹은 고향 잃음이라는 상태를 통해 역사가는 자기가 다루는 역사 자료의 원천이 환기시키는 세계의 이방인이 되며 외양을 파고들어야 하는 추방자의 과제와 부딪힌다. 그 결과 그 세계를 내부로부터 알게 될 수도 있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은 영화를 찍으면서 동시에 역사 기술을 하고 있는데, “남한, 북한, 일본” 그리고 한·일관계의 역사와 통일문제 등을 다룬다. 위에서 크라카우어가 말한 이방인의 위치를 취하면서 세 나라 모두에 대한 경계인으로서 새로운 현재를 만들고자 한다. 이중 가장 절통한 것은 김경석씨의 사연이며, 새로운 미래는 다카키 구미코와 그녀의 한국 친구들, 부천고등학교 학생들이다. 다큐는 김경석씨가 40년 대 초반 강제노동에 동원되어 노역했던 가와사키시를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당시에도 파업을 주도했던 김경석씨는 일본 강관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어 한국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운동을 이끌어왔다. 이후 그는 죽기 전까지 야스쿠니 신사에 강제로 합사된 한국인의 유해를 돌려받는 운동을 해왔다. 황국신민 시기비/일본인이 일본인이 되는 방식은 군인으로 죽어가는 것을 통해서였는데, 죽은 이후에도 모국의 가족들에게 유해를 돌려보내는 대신 야스쿠니 신사에 강제로 봉헌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두번, 세번의 헛된 죽음이며 가족들에게는 회복 불가능한 상실이다. 일본인 관계자들에게 이 사실을 추궁하고 질타하는 김경석씨의 모습은 눈물겹다. 다카키 구미코는 여고생으로 다큐에 출연해 이후 디자이너 공부를 하게 되는데, 그녀가 한국의 고등학생들과 교류하는 모습은 경쾌하고, 정신대 할머니들을 이해한 뒤 일본의 학부형들에게 열변을 토해내는 장면은 기특하다. 약간 뻐드렁니를 하고 잘 웃고 한국 친구들에게 기절할 듯이 반가움을 표현하는 이 소녀는 다큐의 희망이다. 그녀의 주선으로 부천고등학교 학생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견학하고 분노를 토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지만 아무래도 두 나라 사이의 심도 깊은 청소년 교류는 다소 추상적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송부자씨는 그야말로 한·일간의 역사적 이해에 기반한 공존을 가능하게 하려는 인물로 열정적으로 고려박물관을 세운다. 일본에 가면 한번 들르고 싶다. 또 <재일삼대기> 공연도 보고 싶다.

7년간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이 다큐멘터리는 임진강에서 통일을 기원하며 끝난다. 장사익의 노래가 비장하다. 감독은 한국과 일본의 건강한 공존을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하는데, 이 영화는 그 공존을 위해 역사적이며 당대적인 매듭들, 사슬들, 가시들을 짚어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야스쿠니 신사의 조선인 유해 반환 문제는, 그 저주받은 신사에 아버지의 유해마저 빼앗긴 딸의 항의로 뼈아픈 현재의 쟁점이 된다. 다카키 구미코의 장난스런 웃음은 일본 정부가 정신대 할머니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또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도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지점에 와 비분으로 변한다.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이러한 역사적, 당대적 문제들에 대한 역사적 서술 외에 전문가에 의한 어떤 구조적 분석이 제시되었으면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오랜 작업 끝 2시간20여분의 장편다큐멘터리는 정서적 정치, 기억의 정치를 환기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한, 북한, 일본 문제의 외연이며 내연이고 또 그 핵인 미국과의 관계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또 냉전 시기 동아시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계가 어떤 침잠을 맞고 있을 때 한국사의 외부에 있던 이산민들, 망명객들이 돌아와 어떤 구원의 에너지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2007년 한국 영화계의 조짐이다. 곧 파시즘이 들이닥칠 바이마르 독일에서 저술 작업을 하며 그 국가 외부의 망명객, 추방자가 진정한 역사가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던 크라카우어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전영객잔 독자 여러분. 한해의 끝, 2007년을 잘 건너가시기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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