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기다리다 미쳐>는 네 커플의 이야기에 질적인 편차가 좀 있어요. 어떤 장면은 좋았지만 어떤 장면은 ‘기획영화’로서의 설정을 앙상하게 드러내 아쉬웠어요.“ 김혜리 “그래도 크리스마스에 연인들이 보기에 괜찮은 로맨스에요. 여성 캐릭터들이 피해자나 희생자로 그려지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거꾸로: 다음은 입대한 청년들과 그 연인들의 사례를 들여다본 로맨스 <기다리다 미쳐>를 이야기해볼까요? 저는 군대를 간 적도 없거니와 애인을 군대에 보낸 적도 없답니다.
맹스터: 허허. 이 영화가 판타지영화처럼 보이셨겠구랴.
거꾸로: 뭐 직접 경험해야만 아나요? ^.~ 비록 경험은 없으나 철모에 일련번호 붙이고 줄줄이 앉아 있는 극중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니까, ‘저 가운데 내 남자친구가 있다면 정말 슬프겠구나’ 싶었어요.
맹스터: 참 한국적인 소재죠?
거꾸로: 예, 좋은 소재예요. 관객의 다수가 경험했음직한 한국 특유의 문제니까요.
맹스터: 극 초반 입영 당일 풍경을 보고 있자니, 정말 예전에 입대하던 날이 생생히 떠오르더라고요. 장면 자체가 리얼하다기보다는, 그 경험 자체가 보편적이지만 워낙 강렬하기에 자동적으로 연상되는거죠.그런데, 이 영화 보도자료 보니까, 감독의 이력 제일 첫줄이 ‘육군 병장 제대’더라고요. ^^ 영화보다 귀여운 보도자료라고 생각했어요.
거꾸로: 전역 연도가 감독 이력에 표기돼 있더군요. +_+ 이 영화는 군대 간 남자들의 애환보다 ‘기다리다’라는 제목이 대변하듯 군대 밖에서 일상을 지속해가야 하는 애인들에게 초점을 맞췄더군요.
맹스터:군대 안 에피소드는 사실 묘사가 그리 많지 않죠.
거꾸로:하긴 영화의 외피가 로맨틱코미디인데, 군대에서 남자들이 잃어버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희극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르죠. ^^;; 게다가 군대 이야기가 계속되면 여성관객이 지루해할 테고요. 이 영화는 짝사랑, 친구에게 애인 부탁했다 사달나는 삼각관계, 연상연하 커플, 동거커플 이렇게 네개 유형을 나열해 이야기를 엮었습니다.
맹스터:그런데 네 커플 이야기 사이에 질적인 편차가 좀 있다는 느낌이 있었어요.인디 록 밴드 멤버인 남녀(장희진, 데니안)의 사랑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던 반면, 연상연하 커플(손태영, 장근석)의 이야기는 너무 납작했죠. 심지어 연하 애인으로 나온 장근석 캐릭터는 중반 이후 인물을 제대로 다루지 않아 관객 입장에서 캐릭터 자체를 잠시 잊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거꾸로: 저 역시 같은 밴드 멤버였던 선배 민철을 짝사랑한 나머지 용기를 내서 다가가는 여자 보람의 이야기가 제일 호감이 갔어요. 민철이 좋아하던 여자가 외국으로 유학 간 다음, ‘군인의 고독’을 이용해서라도 마음을 잡아보자고 과감히 계획을 세워서 접근하잖아요? 도시락 예쁘게 싸 면회를 가고, 결국 여관에서 밤을 새게 되죠. 그런데 미리 콘돔을 챙겨갔다가 결정적 순간에 “내 가방에 있어” 하고 여자가 말하는 장면이 참 좋았어요. 용감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더라고요. 근데 그걸 또 심각하게 몰고 가지 않고. 가방에서 못 찾는 바람에 민망해져버리잖아요.^_^
맹스터: 그 장면은 그 자체로 유머러스하기도 했지만, 인물의 성격과 상태를 아주 잘 보여주었기에 저도 좋았어요.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더라고요. 반면에 다른 이야기들은 ‘기획영화’로서의 ‘설정’을 앙상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 좀 아쉬웠어요. 아울러 장르영화에서 어느 정도의 우연은 인정할 수 있지만, 군에 간 남자가 자기 애인이 자기 친구와 자게 된 걸 알게 되는 장면은 우연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생일날 여자가 하필 다른 친구와 약수터에 가고, 하필 그 약수터에 군에 간 남자가 문제가 된 남자와 같이 있고, 하필 그 순간에 ‘해피버스데이 투 진아’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고….-..- 설정부터 마무리까지 지나치게 인위적이란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어요.
거꾸로: 약수터에 뭔가 추억이 있었는데 편집에서 생략된 것이 아닐까요. ^^ 말씀하신 삼각관계 에피소드가 지닌 근본적인 불편함은 관객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걸 극중 인물들만 모르는 척하고 행동한다는 점이었어요. 남자가 삼총사의 한명에게 “우리 찡아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해” 하는 순간부터 결과가 예측되는데, 애교쟁이 여자는 계속 “너 은석이 군대 간 동안 나 지켜주기로 했잖아” 이렇게 떼를 쓰니까요. 연상연하 커플에서 경제적인 처지의 차이가 낳는 갈등은 잘 포착한 지점 같아요. “남자친구 여러 번 군대 보내본” 여자가 남자의 옛 애인들 기념품을 보고 크게 화를 내는 점은 다소 갸웃했지만요.
맹스터: ‘군에 남친 보낸 여자들’이라는 기획에 따라 다양한 설정들을 만든 셈인데, 아까 지적했듯, 이야기가 흘러가 갈등을 맺고 또 풀린다기보다는 설정이 그러니까 배우들이 그렇게 기계적으로 연기하고 또 이야기가 그렇게 의도된 궤도를 따라 진행된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편집이 어수선하고, 신 안에서의 구성 역시 리듬을 잃었다는 점도 아쉬웠어요. 네 커플을 넘나드는 구조 자체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해 감정 전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까요.
거꾸로: 예. 결국 이병-일병-상병-병장의 시간적 구성으로 정리했더군요. 그래도 저는 크리스마스에 연인들이 보기에 괜찮은 로맨스라고 생각했어요. 부산 커플은 코미디 기능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정되지만, 나머지 커플들의 결말은 성숙한 태도로 풀기 위해 만든 이들이 노력한 인상이 있었고요. 이 영화 속 여성들이, 어리석은 일도 하지만 피해자나 희생자로 그려지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맹스터:젊은 배우들이 대거 나오니까, 영화가 전체적으로 싱싱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배우 가운데에는 보람 역할의 장희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장근석은 스타성이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거꾸로:초반에는 여배우들의 연기톤이 ‘애교’로 통일된 것 같아서 다소 간지러웠지만 점점 성격에 따라 차별화되더군요. 돌아보자면 연전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도 애인의 변심이 중대한 고비로 나왔죠. 그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군인도 나오고요. <기다리다 미쳐>에서는 군대문화에 대한 부적응을 심각하게 겪는 캐릭터는 없더군요. 그런데 사소한 질문 하나, 부산 커플 중 한여름이 분한 여성은 고등학생으로 설정된 것이 맞나요? 그렇다면 은근히 대담한 이야기네요.
맹스터: 참, “대학의 문은 좁지만 우리는 날씬하다”는 극중 급훈, 진짜 압권 아니에요?
김혜리 “<더 시크릿>은 히로스에 료코가 주연한 <비밀>의 리메이크인데, 원작에 나오는 부녀의 미묘한 성적 이끌림을 삭제하고 위생처리된 가족영화로 방향을 잡았어요.” 이동진 “어떤 작품을 리메이크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인데, 이 영화는 이유를 망각한 것 같아요. 원작의 성적 긴장감과 결말의 신선함을 방기해버렸으니까요.”
거꾸로: 그러게요. 학창 시절 진부했던 급훈이 부끄러웠습니다. -.- 다음 화제는 또 한명의 조숙한 소녀가 등장하는 <더 시크릿>입니다. 교통사고로 엄마의 혼이 딸의 몸에 들어가서 일어나는 갈등을 그린 드라마죠. 히로스에 료코가 주연했던 <비밀>을 뱅상 페레가 연출한 리메이크입니다. 서양 리메이크답게, 빙의 이전 초반부에서 사춘기 딸과 엄마의 갈등을 부각시키더군요.
맹스터: 원작과 가장 다른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죠. 그런 초반 설정은 결국 이 영화가 ‘딸의 몸에 들어간 어머니가 딸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기’에 대한 모티브를 강조하는 이야기로 이어지죠. 어쨌든 그런 모녀간의 이야기를 강조하다보니, 남편 캐릭터가 아주 약해졌죠.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비밀>의 리메이크지만 거기에 엄마와 딸의 몸이 한시적으로 뒤바뀌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코미디 <프리키 프라이데이>의 모티브를 슬쩍 가미한 느낌이 강했어요
거꾸로: 저도 이 영화가 코믹한 부분이 많아서 놀랐어요. 시종 잔잔했던 <비밀>과 달리 아빠와 어린 아들의 몸이 바뀌는 <마법의 이중주>나 <빅>처럼, 다른 세대의 생활양식을 맞닥뜨리며 일어나는 컬처 쇼크 코미디 측면이 강하더라고요.
맹스터: 일본 원작 영화는 단점이 꽤 있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상당히 괜찮고, 배우들의 매력이 적절히 살아 있는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이 영화는 진짜 죽도 밥도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거꾸로: 사실 <비밀>은 아버지와 딸 사이의 미묘한 성적 이끌림을 슬쩍 내비치죠. 마치 오즈 야스지로 가족 멜로드라마의 전통을 참조하듯요. 그런데 <더 시크릿>은 위생처리된 가족영화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맹스터:특히 원작이 신선했던 것은 도입부의 설정이라기보다는 결말 부분인데, 왜 이 리메이크작은 이렇게 어설픈 엔딩으로 허겁지겁 끝나기를 택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거꾸로: 뭔가 터부를 건드리고 서둘러 덮어버리는 인상이죠.+_+ 빙의라는 사건의 결과는 “우린 딸을 전혀 몰랐어”라는 엄마의 깨달음과 “내 안에 그 애가 있어요” 같은 대사로 정리되고요. 알고보니 딸이 엄마를 사랑해서 로커 비밀번호를 엄마 생일로 정해놓았다거나 한때 남편을 공부시키려 대학을 포기했던 아내가 자기개발 욕구를 되살린다거나, 딸의 귀환에 대비해 학교에서 자리를 지킨다거나 등등 가족영화에서 흔히 보던 동기로 인물들이 움직이죠.
맹스터: 사실 이 소재는 근친상간적인 성적 긴장감을 은밀한 동력으로 삼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걸 그냥 하기 싫은 숙제 처리하듯 언급만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죠.
거꾸로: 하지만 육체와 정신은 별개가 아니라 육체가 정신에 큰 영향을 주잖아요? 이 영화에도 엄마가 젊은 딸의 몸을 얻은 뒤 나신으로 거울을 보는 장면도 있고 성격이 좀 변하는 장면이 있죠. 그럼에도 결론은 육체를 그냥 ‘그릇’으로 취급하는 데에 주저앉았어요.
맹스터:맞아요.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정신을 육체보다 상위에 두죠. 딸의 몸에 들어간 엄마의 정신을 딸이 아닌 엄마 그 자체, 로 파악한다는 것부터요. 어떤 작품을 리메이크하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인데, 이 리메이크는 그 이유를 망각한 작품이란 생각을 했어요. 동력으로 작용하는 성적 긴장감과 결말의 신선함이 그 이유일 텐데, 둘 모두를 방기해버렸으니 말이에요.
거꾸로: 애초에 왜 굳이 이 이야기를 리메이크했는지 아리송했어요. 이런 이야기는 터부를 건드리기 때문에 선정적이기도 하지만 같은 이유로 인간의 욕망의 심층을 파고들 수도 있잖아요. ^^
맹스터: 그런데는 관심이 없는 영화죠. “36살의 아내가 16살의 몸을 가졌으니, 뭇 남성들의 로망이잖아”라는 도발적 대사가 나오긴 하지만요. ^^ 그리고 이 영화의 배우들은 기본적인 각색 방향 탓도 있지만 참 매력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남편 역의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상당히 실망스럽기도 했어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로맨틱 가이 연기인데 심지어 아내를 잃고 통곡하는 클로즈업 장면 같은 것은 아주 애매한 위치에 들어가 있죠. 그 장면만 따로 연기해 넣었을 텐데, 배우 자신이 배역에 거의 몰입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하더라고요.
거꾸로: 아, 그런 상상도 했어요. 만약 엄마의 육체에 딸의 정신이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그건 남자들에게 아무 흥미가 없는 이야기일까? 잠정적 결론은 딸보다는 아내의 영혼이 남아 있는 쪽이 남자가 덜 고독할 것 같아요.
맹스터: <키스의 전주곡>처럼 노인과 여자의 영혼이 바뀌는 정도라면 모를까, 확실히 그렇죠. ^^
거꾸로: 그래서 계속 상상하기를, 저라면 차라리 <비밀>을 이렇게 리메이크할 것 같아요. <더 시크릿>은 부부(데이비드 듀코브니, 릴리 테일러)가 원래 매우 금실이 좋은 사이로 나오잖아요? 안과의사인 남편이 “오늘 15쌍의 눈을 들여다봤지만 당신의 눈을 봐야 하루가 시작돼”라는 밀어를 매일 속삭일 정도로요. +_+
맹스터: 흠… 감잡힌다. 시추에이션 좋아. ^^
거꾸로: 저라면 부부를 그냥 아내와 남편이 적당히 멀고 적당히 가까운 평균적 중년부부로 설정하겠어요. 아빠는 흔히 그렇듯 외동딸을 끔찍이 예뻐하고요. 그리고는 짠! 빙의가 일어나는 거죠. 이 편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요?
맹스터: 부부가 위기에 봉착했다면 더 재미있겠네요.
거꾸로: 그런 다음 안전한 길로 가고 싶으면 젊어진 아내를 연상하며 다시 옛날 감정을 느끼는 이야기로 가면 되고, 험한 길을 가고 싶으면 엄밀히 아내와도 다르고 딸과도 다른 이 여자에게 그동안 할 수 없던 말들을 하나둘씩 털어놓으면서,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관계로 되어가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맹스터: 역시 험한 길이 더 흥미롭네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