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영화판은 요즘 봄날이다. 그것을 증거하는 첫 번째 영화로 나는 <봄날은 간다>를 꼽고 싶다. <엽기적인 그녀>의 엽기적인 흥행성적과 <조폭 마누라>의 폭압적인 오락성에는 다소 밀렸지만 오랜만에 만난 수작이었다. 어떤 저널리스트는 칼럼에서 ‘아름다운 영화’라는 찬사를 바쳤다. 그림도 섬세하고 남녀배우의 연기도 제대로 익었다고 평하고 있다. 동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옥에 티를 놓치지 않는다. 왜 이 영화가 한 보수적 상업지의 ‘선전’을 하는 옥외광고를 보여주는지 모르겠다고 야속해 한다. 잘은 모르지만 이 대목에는 뭔가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한 회사의 ‘광고용 영화’라 단언하기에는 복잡한 속내가 있었을 것이다.
대놓고 광고하는 영화?
협찬이나 제공, 배급, 투자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자본의 참여없이 독립적인 영화가 ‘독립영화’말고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그것은 감독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어쩌다 포착한 풍경 속에 그 광고판이 서 있었을 지도. 어쨌든 그보다 더한 ‘광고용 영화’를 우리는 이미 <쉬리>에서 경험했지 않은가?
광고인지 영화인지 모르겠다는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그것은 엄연히, PPL(Product Placement)이라 불리는 마케팅의 전략이었다. 영화가 상업광고를 위한 매체로 쓰이는 것은 이제 어색하지도 않고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PPL은 극장광고보다 훨씬 교묘하고 효과적이다. 그래서 광고주들은 기를 쓰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영화 속의 소품으로 끼워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작품의 순수성을 이유로 영화제작사가 이를 거부하기에는 그 유혹이 너무 크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새로 나온 4륜구동의 ‘M’시리즈를 이런 전략으로 광고해서 짭짤한 성과를 거두었다. 펩시도 영화 속에서 콜라를 마시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면서 관객의 침샘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부산물이었다. 상품들은 영화의 전개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주인공을 보조하는 소품의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런 어정쩡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대놓고 한 회사의 광고를 해주는 영화가 있다. 그야말로 진짜 광고용 영화다. 그런 장르의 아방가르드는 단연 BMW라 할 수 있다. 인터넷을 웬만큼 들락거리는 네티즌들은 www.bmwfilms.com에 올라와 있는 이 다섯편의 단편영화 시리즈를 익히 보았을 것이다. 잠재적, 암시적인 홍보가 아니라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판촉이다. 방송(broadcasting)이 도저히 엄두를 못낼 가공할 위력을 웹 케스팅이 수행하는 것이다.
BMW는 ‘더 하이어’(The Hire)라는 이름을 붙인 5편의 단편영화 시리즈를 2∼3주 간격으로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그것을 착안한 동기는 대부분의 고객들이 구매 전에 자동차회사의 인터넷 웹 사이트를 방문한다는 구매 행태조사 결과였다. 이 상업영화에 고용된 감독들의 면모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요즘 할리우드를 평정하고 있는 시네아티스트들이 대거 출동한다. 이를테면 <해피투게더> <중경삼림> <타락천사> <동사서독>으로 유명한 왕가위 감독, <결혼피로연> <음식남녀> <와호장룡> <센스 센스빌리티>의 리안감독, <스내치>로 스타덤에 오른 가이 리치, <로닌>을 만든 거장감독 존 프랑켄하이머 등. 샤프한 마스크의 액션스타 클라이브 오언이 모든 영화에 고용된 직업운전사로 등장한다.
다섯명의 감독, 주인공은 BMW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이 연출한 <Ambush>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 밴 한대가 다가와 운전중인 차를 정지시키더니 손님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그 승객이 200만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를 훔쳤다는 것. 승객은 다이아몬드를 입으로 삼켜버렸다고 말한다. 운전사는 갑자기 속력을 내고 그뒤를 복면의 괴한이 추격한다. BMW의 다양한 기계적 성능이 카메라 워킹을 통해 유감없이 드러나고 아슬아슬한 드라이빙 묘기가 곡예를 하면서 어느새 차는 승객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리안 감독의 <Chosen>은 신비스럽고 동양적이다. <와호장룡>을 보았다면 푸른 대나무 숲의 아름다운 결투장면을 이 작품의 영상에 투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BMW의 운전사가 야밤에 부두로 한 소년을 마중 나간다. 꼬마는 라마교를 이끌 미래의 지도자로 암시된다. 자동차 뒷자리에 탄 소년은 운전사에게 조그마한 상자를 건넨다. 최후의 순간에 열어보라는 말과 함께. 차가 항구를 떠나려 하자, 정체불명의 자동차 두대가 앞을 가로막는다. 소년을 해치려는 라마교 내의 반대파들이다. 운전사는 그들을 따돌리고 숨막히는 곡예운전 끝에 안전하게 소년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 그러나 소년의 인도를 맡은 스님도 알고 보니 그 소년의 반대파 인물. 정체를 알아차린 운전사는 격투 끝에 소년을 구출한다. 다시 차로 돌아온 운전사가 상자를 열어 보니, 그 안엔 놀랍게도 반창고 하나가 들어 있다. 상처를 입은 자신의 귀에 반창고를 붙이며 미소를 띠우는 운전사. 과연 리안다운 결말이다.
<The Follow>는 왕가위 감독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다. 한편한편 실험적인 영상언어로 현대 젊은이들의 단절과 고독을 담아냈던 ‘아시아의 장 뤽 고다르’. 영상의 음유시인답게 이 영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비록 광고영화였지만 자신의 느낌과 감각대로 작품을 재구성하여 또 한편의 창작물을 내놓았다. 실연, 사랑, 이별…. 이 모든 것들이 짤막한 영화 한편에 다 압축된다. 휘황한 중경 밤거리를 질주하던 카메라가 그대로 BMW로 옮겨온 느낌이다. 그 속도의 이미지 속에서도 이 영화가 끝까지 추적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드라마다. 그래서 다른 시리즈와는 장면의 전개와 아트웍이 사뭇 다르다. 단순히 차의 성능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운전사의 독백을 통해 인간의 심리적 상황을 정밀히 묘사하고 있다. 플롯은 복잡하지 않다. 운전사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남자배우(미키 루크)의 부인을 미행하는 일에 고용된다. 남편은 여자를 부정하다고 믿는 의처증 환자. BMW로 미행을 하면서 운전사는 그녀가 남자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 운전사는 심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 미행을 포기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Star>는 팝의 여왕 마돈나가 주인공이고 그녀의 남편 가이 리치가 감독했다. 강퍅스런 성격의 소유자인 마돈나가 매니저의 뺨을 갈기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리무진 대신 정체 모를 운전사가 앉아 있는 BMW 승용차에 마시던 커피를 든 채 올라탄다. 운전사는 그녀의 매니저로부터 비밀리에 고용된 사람으로, 천방지축인 마돈나에게 본때를 보여주라는 부탁을 받고 있다. 뒤를 쫓는 경호원들을 따돌릴 것을 요구하는 마돈나. 운전사는 BMW의 성능을 최대한 이용하여 도심의 한복판을 질주한다. 레이스카처럼 속력을 내는 차 속에서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뒹군다. BMW는 급제동을 하면서 목적지에 도착하고, 이때 마돈나는 차에서 튕겨나와 카펫 위로 나가떨어진다. 포토라인에 서 있던 사진기자들이 그녀를 향해 마구 플래시를 터트리고…. 마돈나는 커피에 얼룩진 바지를 내려다보며 울음을 터뜨린다.
자본과 예술의 즐거운 만남
<Power Keg>은 최근 주목받는 남미 출신 감독 곤살레스 이냐리투가 연출했다. 약간은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스토리는 다소 부담스럽다. 한 사진기자가 쿠데타로 집단학살당하는 남미 어느 마을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이 사진이 서방세계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쿠데타군은 사진기자를 추격한다. 운전사는 그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해 4륜구동 BMW에 태워 국경쪽으로 달린다. 죽어가는 사진기자는 학살장면이 담긴 필름을 건네주며 신문사에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고…. 운전사는 결국 국경을 넘지만 사진기자는 이미 숨을 거둔다. 사진기자의 목걸이와 그가 찍은 사진이 특종으로 나온 신문을 기자의 어머니에게 건네려던 운전사. 그러나 운전사는 어머니가 장님임을 알고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선다.
네 편의 영화는 평균 6∼8분 정도 분량인데 상영시간의 반 정도는 차의 성능묘사에 할애하고 있다. 급가속 능력이나 제동 능력, 핸들링 등등의 주행성능뿐만 아니라 계기판이나 수동기어,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 페달의 모습까지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커머셜의 본분을 결코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승용차’(Ultimate Driving Machine)라는 BMW의 일관된 브랜드 이미지는 절정으로 올라간다. 이 단편영화들은 동시에 TV-CM으로도 방송되었고 Bravo 나 IFC(Independent Film Channel)와 같은 미국의 케이블TV 채널을 통해서도 방영되고 있다.
아무튼 BMW는 상업메시지를 담는 혁신적인 매체를 개발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와 광고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장르라는 의미의 신조어, 무버셜(movercial)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광고영화는 자본과 예술의 동거를 모색하는 실험이라 할 수도 있다. 이를 두고 ‘자본에 고용된 예술’이니 ‘감독들의 용돈벌이를 위한 외도’ 정도로 폄하할 일은 결코 아니다. 수용자는 변하고 있고 그에 따라 미디어도 변하고 그 안에 담길 콘텐츠도 당연히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이현우/ 광고칼럼니스트 hyuncom@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