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DVD > Inside DVD
[해외 타이틀] 프루스트적인, 그러나 잔인한 <먼 목소리, 고요한 삶>
ibuti 2007-12-28

테렌스 데이비스의 <먼 목소리, 고요한 삶>은 원래 장편영화로 기획된 작품이 아니다. <먼 목소리>를 완성한 뒤 말할 게 남았다고 생각한 데이비스는 제작에 참여한 BFI에 좀더 기다려달라고 요청했고(제작을 총지휘한 사람은 평론가 콜린 매케이브였다), 2년이 흐른 뒤 <고요한 삶>을 붙여 장편영화를 완성했으며,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 <먼 목소리, 고요한 삶>은 1940, 50년대의 리버풀에서 노동자 계급의 생활을 꾸려나가던 부모와 누이, 형에 대한 감독의 기억을 재현한 영화다. 그러나 영화는 시간 순서를 따르기보다 의식, 기억, 감정의 흐름(감독의 표현으론 ‘기억의 모자이크’)에 맞춰 진행된다. 어느 평론가가 ‘프루스트적인, 그러나 잔인한’이라고 평한 건 그래서다. 1부 <먼 목소리>의 줄기가 폭군 같은 아버지의 죽음과 그의 폭력적인 성향 그리고 누이의 출산이라면, 2부 <고요한 삶>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상대적으로 밝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구성원 사이로 자리하는데, 감독은 향수나 감상을 배제한 채 사랑, 죽음, 기쁨, 슬픔, 두려움, 가족생활 등 인간이 겪는 것들의 본질을 통해 한 가족의 초상을 그려나간다. 그리고 이미지와 함께 이 영화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는 ‘음악’이다. 영화 전체에 걸쳐 가족과 친지들이 실제로 즐겨 부르던 노래가 배치되고, 배우들의 입을 빌려 그 노래가 불리는 <먼 목소리, 고요한 삶>은 한편의 뮤지컬 혹은 오페레타처럼 보인다. 어릴 적 보았던 뮤지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는 감독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처음 보았던 영화 <싱잉 인 더 레인>에 오마주를 바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데이비스의 다음 작품인 <기나긴 하루가 저물고>와 <네온 바이블>의 노스탤지어와 고요함에 매혹당해 <먼 목소리, 고요한 삶>을 역순으로 찾은 사람은 이 영화가 거칠고 시끌벅적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먼 목소리, 고요한 삶>은 만들어진 지 20년이 지난, 한때 걸작으로 평가받았던 작품이 아니다. <먼 목소리, 고요한 삶>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면서 삶의 신비와 진실을 형상화했고,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시적 지위를 득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으며, 영화 예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일깨워준 작품이다.

‘블리치 바이 패스 프로세스’를 거친 초기 영화 중 한편이어서 DVD의 특이한 영상과 무채색에 가까운 색감이 다소 어색할 수도 있겠다.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음성해설을 진행하는 감독은 탄성과 웃음으로 흥분된 감정을 표현한다. 감동적이다. 감독 인터뷰(21분)와 미술감독 인터뷰(7분)를 듣다 한 구절에서 멈칫했다. 미술감독 미키 반 즈반버그는 예산이 적어 여기저기에 부탁하고 빌리는 것도 모자라 훔치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환경을 탓하는 인간들이 들어야 할 말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