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볼티모어 하늘에서 출발한 음악이 방송사 세트장에 종착되는 이야기다. 열린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 향해가는 이야기, 내일을 말하며 어제를 더 어제처럼 보여주는 이야기, ‘굿모닝 볼티모어’에서 시작해 ‘굿이브닝 볼티모어’로 끝나는 이야기…. 감독은 영화 후반부에 도시의 이러저러한 소리와 박자를 거두어 <코니 콜린스 쇼> 안에 봉인한다. 조그만 러시아 인형이 더 큰 몸통 속으로 차곡차곡 들어가듯 인물들은 춤추면서 TV쇼 안으로 들어간다. 노래하며 차례차례 문을 닫는다. 그리고는 ‘쿵’ 마지막 뚜껑을 덮는다. 영화가 끝날 즈음 나는 ‘트레이시’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첫 장면을 떠올린다. 그리곤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바탕 달게 자고 일어난, 미국이 꾼 낮꿈. 피로한 21세기의 백일몽. <헤어스프레이>는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낙관적인 영화다. 동시에 시종 긍정적이어서 이 낙관을 과연 낙관이라 할 수 있을까 묻게 만드는 영화다. 이 미국산 뮤지컬이 보여주는 희망은 박제된 연푸른부전나비 표본처럼 아름답고 평면적이다.
<헤어스프레이>는 즐겁다. 트레이시를 위시한 10대의 꿈과 욕망은 ‘치이익-’ 시원한 소리를 내며 가볍게 분무된다. 사람들은 춤추고 화해하고 응징한다. 그 세계는 ‘재클린 캐네디’의 머리모양처럼 매끄럽고 둥글둥글하다. 트레이시는 노래한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아버지는 권고한다. 그럼 나가봐, 여긴 미국이야. 콜린스는 벨마에게 대든다. 이게 미래예요. 그러나 매력적인 대사는 따로 있다. “저 뚱땡이 빨갱이를 끌어내야 해”라든지 “(흑인과 백인을) 섞어? 이게 무슨 칵테일이야?”와 같은. 60년대의 긍지보다 그 시대의 편견을 드러내는 대화들. 인종차별을 다룬 부분은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다. 그것은 개인의 입신양명을 자주 다루는 뮤지컬 장르에서 드문 소재이기도 하다.
아쉬운 건 그 시기, ‘편견’이라기보다 ‘상식’에 가까웠을 혐오나 공포의 정서를 보통 사람들이 아닌 악인 몇몇에게 뒤집어씌운 점이다. 트레이시는 카메라 앞에서 대통령이 된다면 모든 날을 ‘니그로 데이’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주위 스탭들이나 10대들의 낯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가 비추는 건 속물적인 벨마와 스폰서의 경악한 얼굴뿐이다. ‘미스 헤어스프레이’를 뽑는 생방송 중 무대 위로 흑인이 뛰어들 때도 마찬가지다. <헤어스프레이>는 작은 선(善)이 큰 악(惡)을 향해 벌이는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큰 선(혹은 다수의 좋은 사람들)이 작은 악을 물리치는 얘기로 끝을 맺는다.
흥미로운 건 트레이시의 ‘먹는 몸’, ‘흔드는 몸’이 ‘시위하는 몸’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특별히 의식이 있는 것도 책을 보는 것도 아닌 트레이시가(“전 온종일 <코니 콜린스 쇼>만 생각해요!”) 흑인들 편에 설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과 함께 춤을 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구호’나 ‘당위’가 아니라 그들을 ‘몸’으로 먼저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진보적 가치에는 동의하면서 신체적 접촉 앞에선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내가 상상하는 몸과 머리의 속도가 다르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 있다. 트레이시에게 흑인과 함께하는 게 ‘즐거움’인 반면, 내게는 ‘교양’이었던 셈이다. 비록 차별철폐란 피켓이 어정쩡하게 나오긴 하지만, 흑인과 ‘춤’으로 먼저 소통한다는 ‘헤어스프레이’의 설정은 뮤지컬이란 장르와 잘 맞아떨어진다.
다행히 미스 헤어스프레이의 우승자는 트레이시가 아니다. 물론 엠바도 아니다. 영화는 주인공의 수를 볼티모어 공동체로 불려나가길 원하는 듯하다. 이것은 물론 나쁜 결말이 아니다. 영화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본 것뿐인데, 이상하게 겸연쩍은 기분을 느낀다. ‘넌 큰 대가를 치를 거야’란 말과 달리 볼티모어 사람들도, 우리도, 너무 큰 것을 너무 쉽게 얻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옳은 구호’의 평편함에 비해 사람 속은 훨씬 깊고 구불거리고 복잡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모닝’이 그닥 굿‘모닝’하지 않다는 걸 알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볼티모어 사람들의 화려한 축제는 텔레비전 안에 그대로 갇혀버린 채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렇게 갇혀 있는 채 열린 주장을 하면서 막을 내린다. 순전히 ‘즐겁자’고 만든 영화를 정색하며 살피긴 멋쩍지만 이왕이면 그 즐거움이 개운한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