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챔피언스리그의 계절이다. 물론 이제 막 토너먼트의 막이 오른 단계지만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하다. 역시 챔피언스리그의 맛은 겨울에 벌어진다는 데서 온다. 긴팔 옷을 입고 장갑을 낀 채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언 땅을 누비는 축구선수의 모습이 어떨 때는 가학적인 쾌감을 준다. 게다가 계절 탓인지 승자의 환호성보다는 패자의 눈물이 더 크게 다가오는 대회여서(저 눈물이 마르면 금세 차가워져서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묘한 비극적 무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처럼 승패의 명암이 칼처럼 갈린다는 사실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 바닥에서 글을 써서 먹고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스포츠맨들이 가장 부럽다. 아니 정확하게는 스포츠평론가나 기자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스포츠는 그냥 실력 그대로를 얘기하면 된다. 잘하면 칭찬하고 못할 때 욕하면 그만이다. 물론 그런 점에서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분야는 오히려 변수가 많은 축구 같은 스포츠보다 육상이나 수영 같은 기록경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바닥에서는 좋은 영화라고 칭찬할 때는 별탈없지만 진짜 별로인 영화라고 생각해서 욕하기에는 굉장히 난감한 경우가 많다. 아마 그게 스포츠와 예술의 차이점인 것 같다. 가령 <올드보이>가 좋다, 안 좋다는 개인마다 다 다르지만 운동선수가 잘하고, 못하고에 대해서는 별로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한 감독이 후진 영화를 만들고도 곧장 차기작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미 실력이 고갈된 선수가 다른 팀의 부름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대포알 같은 자살골’이니 ‘자로 잰 듯한 패스미스’ 같은 표현도 있을 수 없고 ‘이영표의 핸들링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느니 ‘설기현의 역주행은 훗날 분명히 재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바보 취급을 당할 거다. 게다가 스포츠는 결정적으로 나이의 제약을 받는다. 실력을 둘러싸고 아무리 논란이 많은 선수라도 어쨌건 마흔살이 돼서 경기장에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레 도태되는 것이다.
어떨 때는 내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유가 가장 정직한 분야가 스포츠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축구 역시 지난 월드컵을 계기로 심판 판정으로 인한 잡음을 해소해야 한다는 ‘과학’적 요구에 직면해 있긴 하지만, 어쨌건 가장 ‘정치’가 덜 개입되는 분야가 바로 스포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예술작품에 저주받은 걸작은 있어도 프로스포츠에서 저주받은 선수는 드물 것이다. 뭐 종종 그런 표현을 쓰긴 하지만 자신의 실력과 무관하게 점수가 내려지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지지리도 실력없는 선수가 정치와 입담만으로 영웅이 되진 못한다. 누군가의 권력으로 인해 주전자리를 꿰차거나, 대표팀에 발탁될 수 있겠지만 결국 모든 것은 실력으로 가려진다. 약물 복용이라는 편법도 있겠지만 어쨌건 그들의 폐활량과 근육을 키우는 것은 부지런한 훈련 외에는 없다.
그런 정직이라는 측면에서 요즘 대선을 둘러싼 정치를 보면 더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실력보다 편법과 권력을 통해서, 그리고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여러 가지로 자신을 위장하고 더 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정치판이다. 거기서 그나마 가장 최소한의 기준으로 그 자격을 가늠하는 것이 바로 법일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그것도 틀려먹을 때가 있다. 답답한 일이다.